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어 (문단 편집) == 상세 == [[고구려]], [[백제]]에 비해 그나마 자료가 많이 남은 고대 언어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여러 고유명사, [[향가]] 등 문학, 당대 자료인 [[금석문]],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신라어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언어를 구체적으로 고찰해내기에는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신라는 약 천 년이나 역사가 지속됐고 중간에 [[삼국통일전쟁]] 등의 격변을 많이 겪었기에 전기와 후기의 언어도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까지 밝혀내기에는 현재로서는 어려운 상태다. 신라어 연구는 주로 [[중세 한국어]]와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를 중심으로 시작해 차츰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영역을 넓혀 최종적으로 676년 [[삼국통일]]을 이룬 후, 약 200여 년간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면서 한국어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만이 한국어의 기반이 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계통의 언어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려 이후로는 한반도 중부지방의 언어가 1000년이 넘게 한반도의 중심언어가 되어왔으므로 고구려, 백제 접경지역의 방언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다만, 이러한 주장들은 남북대립에 의한 정치적 의도의 영향을 깊게 받기도 했기 때문에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오직 순수한 학문적 연구성과에 의해 사실이 밝혀지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고대 한국어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연구가 힘들다.[* 이러한 자료 및 연구의 미비는 국어 연구가 정치권 및 각종 유사과학의 입김을 받기 쉽게 만드는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다.] 그나마 목간자료가 발굴되어서 당대의 신라어 문법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목간이라고 해도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계점이 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참고로 신라의 서울 '셔라벌(徐羅伐)'이 음운변화를 거쳐 현대어의 '[[서울]]'이 되었다.]이 지금의 [[경상도]] 지역인 점과 연결시켜 일부 [[창작물]]에서는 신라어를 현대 [[동남 방언|경상도 사투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대 경상도 사투리는 현대 한국어로,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신라어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굳이 사투리로 따지자면 고려 시대의 중세 경상도 지역 사투리가 신라어와 아주 비슷했을 것이다. 신라어 [[인명]]들은 우리말로 풀이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 거서간|혁거세]](赫居世)는 ‘붉(밝)은누리’[* 혁거세의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가 원래 그의 이름을 발음대로 음차한 표기이다.], [[유리 이사금|유리]](儒理)는 ‘누리’, [[소지 마립간|소지]](昭知)는 ‘비처(毗處, 빛)’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거칠보)'[* '荒'은 거칠다는 뜻으로 '거칠부'의 '거칠'에 대응되는 것이다.],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잇보, 현대식으로 이끼보)', 세종(世宗)을 ‘[[노리부]](弩里夫, 누리보)', 염독(厭獨)[* 삼국유사 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염촉(厭髑)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라 하니 이는 우리말의 다름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쓴 것이니 곧 조사(助辭)이다."][* '염(厭)'은 '싫어하다'라는 뜻의 한자인데 이를 통해 그것에 대응되는 당대 고유어 표현은 ‘이차(異次)’나 ‘이처(伊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어에서 '싫어하다'는 표현은 '잋다'임을 재구해 볼 수 있다. 이는 중세국어에서 '피곤하다'는 뜻인 "잋다"와 일맥상통한다.]을 ‘[[이차돈]](異次頓, 잋돗)’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뿔 어원.png|width=100%]]}}}|| || {{{-2 '''신라어에서 처음 문증되는 대표적인 어휘 '뿔'. '''}}} || 지금 현재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어원 또한 [[신라]] 대대의 수도였던 [[금성(동음이의어)#s-1|금성]]이 위치한, '[[서라벌]](徐羅伐)'이란 단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변형하여 마침내 '''서울'''이라는 어휘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신빙성이 있는 편이다.[* 참고로 '서라벌'은 비슷한 음가의 고유어를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한 것이기에 실제 발음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며, 같은 어원으로 추정되는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따위의 다른 표기들도 기록에서 많이 등장한다.] '서라벌'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서라벌이 '금성(金城)'이라고도 불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당 명칭이 '쇠(金)'+'벌(野)'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어원도 서라벌, 사로국 등 'ㅅㄹ' 계통의 이름이 어원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와 '서울'이라는 두 단어가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 어원인 셈이기도 하다.[* 로마의 경우가 있듯, 수도명과 국명이 동일한 사례는 꽤 많다. 현대에도 [[과테말라]], [[멕시코]], [[쿠웨이트]], [[파나마]] 등 그러한 나라가 꽤 있다.] 또한 신라 지명에는 ‘伐’ 또는 ‘火(블)’을 가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후기 백제어 지명의 ‘夫里(부리)’에 대응되는 것으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의 ‘셔ᄫᅳᆯ(서울, 京)’, ‘ᄀᆞᄫᆞᆯ(고을, 郡)’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대 국어의 "벌판" 또한 이 단어의 명맥을 이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고유명사의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신라 말엽에 김대문(金大問)이 어원을 제시한 것이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에 관한 것인데, 이로 보아 그때에도 이 단어들의 어원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차차웅'은 무당, '이사금'은 잇금, '마립'은 말뚝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였는데, 이 모두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사금(尼師今)'에서의 '금(今)'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단어로 추측되며, 이는 [[중세국어]]의 ‘님금([[임금]], 主君)’에도 남아있다. 고대 일본어의 'kimi(君)'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존재한다. '마립(麻立)'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는 '마루', '머리'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차차웅'이 실제로 '무당'을 뜻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차차웅'의 동계어로 추정되는 '스승'은 평북 및 함경 방언에서 '무당'을 의미한다.[[https://ko.dict.naver.com/#/entry/koko/182e73b27e93405296bdc09f4cab6bfb|#]]]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 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 >그곳 말로 성(城)은 ‘건모라(健牟羅)’[* "큰 마을"을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라"의 경우 일본어 "무라"와의 연관성 또한 제기된다. 한국어 '마을'의 중세 형태인 'ᄆᆞᅀᆞᆶ'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마을'과의 관련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하는데 역시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다. …관(冠)은 ‘유자례(遺子禮)’, 속옷[襦]은 ‘위해(尉解)’, 바지[袴]는 ‘가반(柯半)’[* 남자의 여름 홑바지를 뜻하는 [[고의#s-3|고의]]의 조상격 단어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가배(珂背)', 조선 초에는 'ᄀᆞ외'였다.], 신[靴]은 ‘세(洗)’[* 세(洗)가 선(先)의 오기로 볼 시 현대 국어의 "신"과 발음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라 한다. >---- >《[[양서(역사책)|양서]]》 〈신라전(新羅傳)〉 中 기타 자료로는 중국의 [[양서(역사책)|양서]] 신라전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역시 양서에서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을 거쳐서 (중국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언어가 같거나, 또는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만 백제가 중국과 신라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만큼 중국어와 신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이 정황상 매우 높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뜻을 알 수 없는 신라어 단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彦)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테히코(手彦)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 일본어 음독은 クスニジリ(쿠스니지리).],,(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中 일본서기의 기록을 정리하자면 왜군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군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고,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구수니자리'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일 테니 아쉬운 심정을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일각에서는 신라 장수가 피곤한 나머지 "궂은 일이구나"이라고 말하였고, 신라어를 모르는 왜장이 이를 '구수니자리'로 들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37379|#]] 그러나 당시에도 '궂은 일'이라는 표현이 쓰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뿐더러,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궂-'의 말음 /ㅈ/이 /ㅅ/으로 바뀌고 '일'의 말음 /ㄹ/이 탈락된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낼 수 없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한 주장은 아니다.][* 일단 '궂다'는 중세 한국어에서 확인되지만 신라어 등 고대 한국어에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https://en.wiktionary.org/wiki/%EA%B6%82%EB%8B%A4|#]] 'ㅈ'이 'ㅅ'으로 변형된 것은 백제어 '건길지'가 일본에서 '고니키시'로 음차된 바에서 알 수 있듯 선례가 있긴 하다. 하지만 'ㄹ'의 탈락은 오리무중.][* 끝의 -ziri 부분을 현대어에서 의지를 표현하는 -으리로 보아 미래지향적인 다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종결어미 '-리' 앞에 '지'가 붙은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추측에 그칠 뿐이다. 즉, 현재까지 '구수니자리'의 정체에 대한 확실한 가설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