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어 (문단 편집) ==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신라]]는)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겨 (남과) 약속을 했다. (중국과 통하기 위하여) '''언어는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한다.'''[* 위 문장을 해석할 때 많은 논란이 생기곤 하는데, 바로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소통할 수 있었던 대상이 대체 어느 나라냐는 것이다. 일단 본 문서에서는 통역이 필요했던 대상이 '''중국'''이었을 거라는 설을 채택하고 있다. 앞에서 고구려를 언급하는 문장과 뒤에서 언어는 백제를 중간에 놓아야 한다는 문장은 '''서로 연결되는 문장이 아니라'''고 보는 것. 이는 중국어 위키문헌에서 제공하는 [[https://zh.wikisource.org/wiki/%E6%A2%81%E6%9B%B8/%E5%8D%B754#%E6%96%B0%E7%BE%85|원문]]에 임의로 표시된 중국식 온점(。)과 반점(,)에 입각하여 해석한 것이다. 물론 사서가 편찬되었을 당시에는 문장부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확실한 사항은 아니다.] >----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中 [[신라]] >{{{-1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 (신라는)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새겨 의사를 전한다. '''언어는 백제를 거쳐야만 (중국과) 통할 수 있다.''' >---- >《[[양서(역사책)|양서]]》 〈동이열전〉 中 [[신라]] 《남사》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에서는 신라어가 [[고구려어]], [[백제어]] 등 부여 계통 언어와 유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도 세 언어는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데, 바로 아래와 같은 공통된 특징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사성으로는 각국의 관등 및 인명에서 유난히 자주 나타나는 '지', '보', '마' 계열의 존칭 접미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와 [[고국양왕|어지지]](於只支),[* 을지문덕의 '지'가 존칭 접미사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의 '[[건길지]](鞬吉支)', 그리고 신라의 '[[김알지|알지]](閼智)', '[[유리 이사금|세리지]](世里智)' 및 '[[김거칠부|거칠부지]](居七夫智)'에서는 공통적으로 접미사 '-지'가 등장하고 있다. 가야의 '[[좌지왕|좌지]](坐知)', '[[김탈지]](脫知)', '[[도설지왕|도설지]](導設智)' 또한 이에 해당한다. 병마를 맡은 관직인 대보(大輔), 우보(左輔), 좌보(左輔)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최고위 벼슬이기도 했다. 이 '보(輔)'는 나중에 '부(夫)'로 변형되어 '중외대부(中畏大夫)'를 비롯한 관직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 신라의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 등의 인명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어휘는 현대 한국어에서도 '뚱보', '울보', '먹보', '느림보' 등에서 접미사로 남아있다. > 十二年春正月戊子朔 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但奉翳美人更着袍袴 > 12년(740) 봄 정월 무자년 초하루, 천황이 대극전(大極殿)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渤海)의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신라에서 파견된 유학생을 뜻한다.]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다만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 >《속일본기(續日本紀)》 740년 1월 1일 기사 동북아역사재단 소속 사학자 고광의는 이 대목을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증거로 보며, 신라학어를 함께 앉힌 이유는 일본 조정과 발해 사신 사이의 통역을 신라학어에게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발해어와 신라어 화자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다만 일본의 학자 유자와 타다유키의 반론에 따르면, 신라학어가 초대되는 일은 평소에도 많았고 정식 통역을 맡은 신라역어가 언급되지 않거나 신라학어가 통역을 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그 자체로 증거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라어를 [[부여]] 계통 언어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민족은 항상 북방민족과 중국대륙의 지배만 받고 살아온 열등한 민족이라는 [[식민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한 백제, 만주계열 북방민족에게 지배자적인 위치로 있었던 고구려가 열등하고 타율적인 한국인의 조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신라 조차도 당나라의 계림도독부를 축출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타도한 것을 보면 신라 역시 당대 최강국인 당나라와 싸울 정도로 국력이 나름 상당했고 중국에게 맞서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서 삼국시대 후반 신라어가 고구려어, 백제어와 같은 계통인 것 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걸 간과한 주장이다. 심지어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록들을 보면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한(韓)어' 계통의 언어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비다츠 덴노|민달]] 12년([[583년]])조의 기록에서 [[백제어]]를 '한어(韓語)'라 칭하고 '카라 사히즈리(カラサヒヅリ)'라는 주석을 달았음이 드러난다.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33_0130_0030_0010|#]] [[https://archive.wul.waseda.ac.jp/kosho/ri05/ri05_01940/ri05_01940_0010/ri05_01940_0010_p0053.jpg|#]]] 반면 [[일본서기]] [[비다츠 덴노]]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역관]]을 따로 두었을 정도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하며 자국의 언어와는 따로 구분했다.[* [[비다츠 덴노|민달]] 4년([[575년]]) 4월 6일 [[백제]]에 길사역어언(吉士譯語彦; 키시노워사히코)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역어(譯語)는 통역관을 뜻한다.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33_0050_0030_0010|#]]] 그리고 백제어의 계통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르다는 서울대 언어학과 이기문 교수의 주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중반부터 지배층과 피지배층에서 서로 언어가 통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 없이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들도 백제 왕을 모두 코니키시([[건길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기문 교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최근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서 백제 지역의 [[삼한|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와 [[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삼한|한]][[예맥|예]]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한다.[*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http://www.earticle.net/Article.aspx?sn=35864|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 다음의 [[https://www.youtube.com/watch?v=7smv-FtDzks&t=4m13s|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까지는 고구려인을 수묘인으로 사용하다가 고구려인이 피폐해질 것을 염려한 [[광개토대왕]]이 한예인을 수묘인으로 삼으라고 유언을 남겼고 [[장수왕]]은 한예인만으로 수묘인을 충당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한, 예인 각각 1/3 비율로 수묘인을 충당한 것(이성시, 박경희 옮김,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17)은 꼭 고구려인과 한예인이 문화적, 언어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한예인은 피정복민이고 그들의 문화적, 언어적 성격이 얼마나 이질적이건 간에 고구려의 행정력 내지는 무력이 그들의 이질성을 강제로 고구려 사회에서 존재하게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이질적이건간에 상관없이 그들은 수묘인으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재반론을 하자면 광개토대왕비문에서 한/예인들과 고구려맥인들의 의사소통이 문제가 없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한/예들이 고구려의 묘지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모를까봐 고구려 사람들을 더했다는 말이 나올 뿐이다. 게다가 백제 지배층이 예인이라는 것도 확실치 않다. 예인이라고 정확하게 불렸던 경우는 [[옥저]], [[동예]] 지역 사람들 뿐이고 막상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양맥으로 불렸다. 한성백제 시절 동예지역 예인들이 백제로 편입했으나 그들은 피지배계층이였을 것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아무리 백제를 밟았어도 귀족 등 지배계층한테 묘지관리를 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백제가 이중언어체계가 맞다면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류와 언어가 같을테고 남쪽 마한계 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당장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 남부의 한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백제의 언어가 '부여어'와 '마한어'로 나뉘어 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록이라 백제가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는 이기문 교수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애초에 '''고고학적인 면에서 마한계와 상이한 형태를 가진 부여계 집단이 백제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리어 현재 존재하는 사료들은 부여와 비슷하게 예맥계 집단인 고조선이 마한계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근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서는 '''[[신라]]의 건국 세력이 [[예맥]] 계통인 [[고조선]]의 유민들이며, 이들이 [[진한]] 6촌을 형성했다고 분명히 나오는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에 서술된 진언(진한어)의 언어 계통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중국어 계통이 아닌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분명히 나온다. 또한 후기 백제인들은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 주의할 점은, 백제어 연구가 대단히 미진하기 때문에 전기어휘, 후기어휘 운운할 정도의 연구성과가 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문서에 의하면, 전기 백제어 건길지에 대비한 표현인데, 정작 건길지(코니키시)는 백제 멸망 후에도 사용된 용례가 있다. --애초에 (전기든 후기든) 백제어 연구 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라 "분명하다"는 식의 단언을 내리기 어렵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현대 한국어의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단, 동일 출처인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의 왕칭으로 "니림"(主)을 언급하고 있다. [[백제어]] 문서의 "니리무는 니림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따를 경우, "니림"은 백제어 "니리므"와 별개의 가야어로 볼 수 있고, 삼한/삼국의 언어가 대체로 비슷하다는 가정을 더할 경우, 니리므와 니림은 마한/변한간 방언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님]]의 어원은 --전기 후기 백제어 운운 할 필요 없이-- 그냥 삼한 땅에서 사용되던 고대 한국어족 공통 어근(지역별 억양/발음차 존재)에서 출발한 것으로 상정될 수 있다.]) 하지만 '니리므'가 어느 계통의 단어인지 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니면 피지배층만이 사용하던 단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백제인들 모두가 사용하던 단어인지 아직 불명이고 무엇보다 모든 백제인들이 왕을 '니리므'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을 때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그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을 호칭하던 기존의 단어가 '백제 후기'에 와서 다른 단어로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4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들'''('''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결론적으로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같은 언어계통이고 신라어는 그런 백제어와 또 같은 언어계통이므로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가 모두 같은 언어계통이라는 사실을 추정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기록이 무려 천년 뒤의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후에 삼국사기 편찬 당시 무려 천 년 전에 축성된 [[풍납토성]]의 발견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상황이므로 단순히 천 년 뒤에 편찬되었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저 확증없는 추측성 주장일 뿐이다.[* [[삼국사기]] 문서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당시에도 옛 부터 이어져온 여러 역사서를 인용하여 정리한 역사서이다. 즉, 인용된 역사서는 삼국시대 당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 이런 식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옛 역사서 대부분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또한 서울대 언어학과 출신이며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관시킨 이기문 교수의 제자인 이승재 교수 또한 저서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에서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언어 표기 체계의 차이를 정리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1/0200000000AKR20171011173300005.HTML]]] 일단 위의 주장들은 모두 아직까지는 가설의 영역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또''' 최근 국내외 언어학계의 관련 연구를 통해 고구려어, 백제어 등 부여어족에 해당하는 언어들이 신라어족-한국어족과 사실상 같은 계통 언어의 방언(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모두 고대 한국어의 방언에 속한다는 주장)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2010년대로 들어 백제어에서 한국어 계통의 수사가 발견된 현재, '''국내외 언어학계에서 백제어는 사실상 한국어족으로 잠정 결론났다.''' 현재 국내외에서 [[동북공정]], [[만선사관]]의 영향이 있는 [[중국]], [[일본]]을 빼면 '''부여어족을 일본어족으로 보는 학설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일단 중국 사서와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 고대 중국과 일본의 사서들에서는 부여어족이 퉁구스어족이나 일본어족과는 언어가 유사하더라도 언어 계통 자체는 달랐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에, 둘과 같은 계통으로 연결되긴 어려워 보인다.[* 고구려어와 일본어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반도 일본어설#s-3]]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사료들에서 남은 약간의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 어휘들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대 삼한 언어들의 거의 전부인 형편이라 연구를 하고 싶어도 남은 언어적 자료들이 너무나 부족하다. 수사라고 알려진 단어조차도 확실하지 않고 아마도 그러리라 추정한 결과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