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립 (문단 편집) == 생애 == 1546년 10월 23일 [[성균관]] 생원을 지낸 아버지 신화국(申華國)[* 1546년(명종 1) 증광시 생원시에 2등 13위로 입격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46_150018|#]]]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신잡]]과 신급(申礏) 등 형 2명, 아래로는 신할(申硈) 등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문반 가문으로, 조부 신상(申鏛)은 1503년([[연산군]] 9) 별시 문과에 3등 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03_002157|급제하고]] [[이조판서]](정2품)에 올랐으며, 증조부 신말평(申末平)은 1480년([[성종(조선)|성종]]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30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480_000657|입격하고]]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종4품)에 올랐다. 고조부 신자준(申自準)도 음보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종2품)에까지 올랐다. 1567년([[선조(조선)|선조]] 즉위년) 식년시 무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한[[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a_1567_025041|#]] 이래 여러 무관직을 거쳤다. 1583년 [[함경북도]] [[온성군|온성]] 부사로 있을 때 [[니탕개의 난|북쪽 변경에 침입해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적호(賊胡)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밤낮으로 항거하며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그때 '''[[온성군|온성]] 부사 신립이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과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 이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호인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상절도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신립과 합세하여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해서 70급을 베고, 곧바로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이때 [[경원군|경원]](慶源)·[[종성군|종성]](鍾城)·[[회령]](會寧) 등 진(鎭)의 번호가 모두 배반하였으나 온성의 번호만은 배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립의 무용(武勇)에 승복했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평소에 철기(鐵騎) 5백여 명을 훈련시켜 사냥을 하며 전술을 익히게 하고 연안에서 치돌(馳突)하는 연습을 시켰는데 그 빠르기가 귀신같았다. >---- >선조 수정 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기사 >적호의 대추(大酋)인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왔다.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 여울을 지키며 한참동안 대항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인데다가 권덕례가 피살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돌아와 성으로 들어가니, 적호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군사를 거두어 성을 지켰는데, 해가 저물어 적이 물러가자 부사(府使) 유영립(柳永立)이 나가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영립이 몰래 원희에게 영을 내려 기병장(騎兵將) 김사성(金嗣成)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적의 머리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 와서 포위하였는데 해가 질 무렵 '''[[온성도호부]]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는데,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신립이 응하지 않고는 북 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5월 1일 기사 위 기록들은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수록된 전훈들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재수록한 것이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용맹과 무예만큼은 당대 최고였는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 1발로 적장을 사살해 적들이 물러가게 했다.", "혼자서 수십 명을 쳐죽였다.", "신립의 용맹이 무서워서 감히 적들에게 항복하지 못했다." 등의 서술로 신립의 용맹을 칭찬하고 있으며 백마에 탄 적장을 일격에 쏘아죽여 적을 물러가게 한거나([[경원군|경원]]진 전투) 아군을 포위한 [[여진족]] 기병 1만 명에게 돌격해 적장을 사살하고 퇴각하는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는(훈융진 전투) 무시무시한 무용을 볼 수 있다.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었는데 마치 [[조아킴 뮈라]]처럼 신립이 [[말(동물)|말]]을 타고 적진을 돌격하면 그대로 길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신립이 이렇게 싸우고 이기자 포상을 위해서 [[서울특별시|한성]]에 입성했는데 [[선조(조선)|선조]]가 어찌나 놀라고 감동했는지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공을 인정받아 1584년 3월 북도병사(北道兵使)에 임명되었고 1587년 [[고흥군|흥양]]에 [[왜구]]가 침입해 녹도 만호 [[이대원]]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해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이 시기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고 삼사(三司)가 [[탄핵]]하여 파직되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1587년 12월 함남 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다. 1588년 적호부락(賊胡部落)을 공격해 [[포로]] 20명과 말 3필을 참획하는 공을 세웠으나 [[하극상]]을 일으킨 수졸을 독단적으로 참한 [[죄]]로 파직되면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졸개가 부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일으켜 신립이 처형한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그 날로 사간원에서 '선참 후계(전시가 아닌데 보고도 하지 않고 먼저 참형)하였다.'고 3차례씩이나 [[태클]]을 거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다만 사헌부가 신립을 잡아 국문하겠다고 요청하자 선조는 "수졸을 벤 일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나 사실 수졸의 죄는 당연한 것이다."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헌]]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몸사리지 않고 세운 공이 [[중국]] [[한나라]]의 [[이광]]에 비할 만하니 형벌이 과하다."고 주장했다. 탄핵되기는 했지만 여진족 토벌에서 워낙 용명을 쌓았던지라 당대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니탕개의 난]]은 그 시점에서 조선 [[건국]] 이래 최대급 외침으로 조선 [[전국]]이 [[준전시]]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전란에서 으뜸가는 전공을 세웠으니 대접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립의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맹장형으로 일신의 무예를 활용한 개인 전술로 적진에 과감히 돌격하는 것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 [[니탕개의 난]] 이래 전시 상황이던 조선은 다시 왜침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 때 신립은 한술 더 떠 "왜적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니 아예 [[수군]]을 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데는 수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극력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비변사와 신립이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을묘왜변]]의 경험이 있었다. 을묘왜변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맹선을 주력 전선으로 삼은 조선 수군을 농락했지만 이어진 지상전에서 [[조선군]]의 궁시에 전멸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조선은 신형 전함인 [[판옥선]]을 개발했으나 흥양 왜변에서 판옥선은 만족스러운 전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이는 녹도 만호 이대원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지원을 해주지 않은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의 탓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수군 전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 조선의 왜구 대응은 원래 해상에서의 요격과 기병을 동원한 토벌로 정리할 수 있었다. [[군산시|진포]]에서 [[남원시|황산]]까지 이어진 고려 말 왜구 토벌을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태조(조선)|이성계]]가 거느린 가별초의 기병들이었다. 신립은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잘 예측하고 기병 전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강화하자는 취지에서 이런 의견을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점에서는 아무도 몰랐지만 1592년 조선에 처들어온 적은 옛날 고려 때처럼 [[약탈]]이 목적인 오합지졸 [[해적]] 떼 왜구가 아니었다. [[전국시대(일본)|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전란으로 단련되었고 병법을 익힌 무사들이 지휘하는 [[일본군]] 정규군이 영구적인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침략해오는 [[전면전]] 상황에서 전혀 맞지 않는 대책이었다. 신립 본인의 자만심도 문제였는데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언급하며 걱정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 대로 맞는답니까"하며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혀를 차며 패전을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조총의 성능을 떠나서 화기가 가진 압도적인 위력과 화기의 집단운용이란 개념은 조선초기부터 정립되어 조선에도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립의 군사 커리어나 기록에 남은 그의 전투방식을 보면 신립은 고전적인 기병전술에만 매달렸을 뿐 화기와 이것을 집단으로 운용하는 전술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머지 않아 [[임진왜란|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일본/군사사|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오?" > >[[류성룡|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머스킷#s-2.1|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 >징비록 중에서 신립은 조총의 존재는 알았으나 궁시를 훨씬 능가하는 조총의 위력과 이것을 집단 운용하는 적을 마주할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이 기록 이외에도 신립의 오만함과 거친 성정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많은데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 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역사)|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제도(諸道)에 보내어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1달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弓矢)와 창도(鎗刀)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다. '''신립은 본래 잔포(殘暴)하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하는 비용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하였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믿었다.''' >---- >선조 수정 실록 임진년 2월 1일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2001_00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원해 나섰으며 [[삼도 순변사]]로 [[충청북도]] [[충주시|충주]]로 출진했는데 이 때 [[선조(조선)|선조]]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을 하사받고 출진했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신립은 [[문경새재|조령]]의 지세를 보고 "지세가 좋지 않다"며 왜병을 넓은 들판에 끌어내 기병으로 무찌르려 한다. 문제는 조령이 병사 하나로 1,000명을 무찌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함정]]을 파놓으면 왜병들을 전부 묻어 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를 버린 것은 실로 큰 실책이었다. 애써 탄금대에서 진을 친 조선군이 왜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거나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전개해서 향후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진격에 지연을 줄 정도의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핵심 전력이었던 수 천의 경군 정예병들만 날려버렸기에 전략적으로도 지대한 악영향만 주었다. 반면 [[추풍령]] 방면의 조선군은 소수 [[병력]]으로 [[거창군|거창]]에서부터 [[구로다 나가마사]]의 선봉 부대를 몇 번이나 저지하였고 전술적 퇴각을 하면서 조령의 신립보다도 왜군을 오래 지연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단 걸 생각하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조령을 지나다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4월 14일 기사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이여송]]조차도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지를 지키지 않다니 신 총병은 참으로 꾀가 없는 장수로다."라며 신립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이여송은 신립이 그 판단을 왜 했는지 모른 채 전해들은 얘기만 듣고 '걔 왜 그랬대?' 하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신립이 왜 조령을 버렸는지는 아직까지 논쟁거리고 이여송의 판단이 절대 정답이라 생각하진 말자. 아무튼 당대인들이 신립의 행동을 이해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여하간 신립은 [[이일]]과 [[김여물]]의 만류에도 사방이 [[논]]인 [[충주 탄금대 전투|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친 채 정면으로 맞섰다가 패했다.]] 물론 신립이 조령을 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배수진과 논은 전투 전개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전해듣고 하는 비판이라는 반론도 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신립이 자만하고 대군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어서 논에서 기병을 이용하고 배수진으로 정면 대결을 시도한 후 죽은 무능한 장수라는 신립의 개인 [[성격]]과 능력에 비롯한 것이라면 반론은 신립이 조선의 구원 투수로서 선조조차 인정한 시정잡배에 가까운 잡병들을 끌고 여러 전략을 시도하였으나 그것이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실패로 돌아갔다는 논지다. 옹호론자들은 조령을 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샛길이나 우회로가 많은 산의 특성상 요새화나 물자, [[지리]]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 유대감이나 훈련도가 없는 병사들을 길목마다 뿌려놓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을 든다.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 참고. || [[파일:달천평야.jpg|width=400]] ||[[파일:달천강.jpg|width=450]]|| || 회전이 벌어진 달천 평야의 모습. || 신립이 투신 자살한 구초대의 모습. || 패색이 완연해지자 홀로 기를 휘둘러 [[조선군]]을 지휘하면서 탄금대에 올라가 활을 당겨 일본군을 쏘아죽였는데 활을 하도 쏴대서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식히고 다시 올라가 쏘고 하는 식으로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죽인 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 때 손을 식히러 강에 [[몸]]을 던지고 나오는 것을 총 9번 했다 하여 그 곳을 구초대(九超臺)라 불렀다고 한다.[* [[http://m.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07|#]]][* 다만 이때 식히려 했다는 것이 깍지손이 아니고 수십 수천 번을 맞부딪히느라 뜨겁게 달궈진 칼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탄금대의 지형상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http://news.tongplus.com/site/data/html_dir/2016/07/08/2016070801041.html|‘열두대’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 중 진짜 유래는?]], 통플러스, 2016년 7월 8일.] 이후 어느 [[어부]]가 남한강에서 잡은 큰 [[잉어]]의 배를 가르다 [[관자|옥관자]]를 발견했는데 달천강에서 죽은 사람 중 [[망건]]에 옥관자를 달 정도로 지체가 높았던 [[양반]]은 신립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옥관자는 신립의 [[유물]]로 밝혀지고 신립의 [[자손]]은 찾지 못한 [[시신]] 대신 옥관자를 묻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설화로는 탄금대 전투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 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