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립 (문단 편집) == 평가 == [[조아킴 뮈라|기병을 다루는 능력과 왕성한 돌격 정신은 최고의 기병대장이자 돌격대장, 용장으로서의 능력]]은 있었지만 [[에마뉘엘 그루시|자신의 능력과 전혀 맞지 않는 보직을 떠맡았고]] 한 나라의 군 전체를 이끌고 적재적소로 배치 및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자질과 지략은 없다시피했다. 신립의 지휘 [[능력]] 문제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스스로 포기하며 방어전에 가장 유리한 곳을 버린것도 모자라 기병전으로 포위섬멸 하겠다면서 늪지화가 된 탄금대라는 허허벌판에서 싸우다 주력군을 모조리 말아먹은 패장이었다. [[선조(조선)|선조]] 시대 직간접적으로 그를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 기록에 남은 신립의 실제 발언은 탄금대에서 [[조선]]군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 신흠이라는 사람이 전한 단순하고 안일한 발언뿐이다. 앞서 [[상주시|상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후퇴하여 합류한 [[이일]]이 "일본군은 종래의 [[왜구]]나 [[여진족]]과 다르다"고 조총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음에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에서 신립은 선봉장 혹은 사령관 휘하의 기병대장으로는 매우 적합하여 훌륭한 지휘관 아래라면 용맹하게 돌격해 전공을 많이 세울 인물이지만 대국을 읽고 전략을 짜는 최고 지휘권자인 총[[사령관]]으로써의 지략과 계획성은 굉장히 부족한 인물이었다며 비판받고 있다. 신립의 능력 중에 인정할 만한 것은 [[인간흉기|뛰어난 무예와 용맹]], 기병 지휘인데 그가 맹장이었음을 부정할 사료는 없으며 기동전을 하면서 현장에서 감으로 바로 부대를 기동시키는 임기응변 능력도 뛰어났다. 물론 조정의 대신들과 그 가솔들이 모두 짐을 싸들고 도망가려던 분위기에서 홀로 자청해 승산이 낮은 전장에 나가고 죽음으로 패전의 책임을 진 점은 무인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전투]]에 불리해지면 제 한 몸 건사하려고 [[왕]]과 [[부하]]들을 버리고 도주하는 장수들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가? 허나 그와는 별개로 지휘관으로서의 신립의 자질은 한계가 명확했다. 신립은 철저하게 일신의 무용과 [[기병]]들을 활용한 전술기동으로 여진족을 여러 차례 압도했지만, 훨씬 신경쓸 게 많은 정규군 대 정규군의 대결을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다. [[니탕개의 난]] 때 여진족은 최대 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체계를 갖춘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대규모로 몰려와 진을 포위하다가 조선 측 원군이 도착하면 이내 포위를 풀었다. 경원부 전투에서는 신립이 지휘관을 저격하자 물러났고 안원보 전투에서는 신립이 결사 항전 의지를 보이자 역시 그냥 물러났으며 가장 큰 승전이라 할 수 있는 훈융진 전투에서조차 신립의 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걸 추격해서 전과를 올렸다. 신립이 수백 규모가 아닌 수천 이상의 대군을 지휘한 건 탄금대 전투가 처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립은 적을 왜구 정도로 깔보고 "지금의 왜병은 전날의 왜구와 다르니 이들과 평지에서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일]]의 조언과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틀어막아야 한다는 [[김여물]]의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국가]]간 전면전이나 대규모 국지전이 없었던 조선은[* 이에 반해 [[일본]]은 [[전국시대(일본)|센코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전략과 전술에 익숙해진 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규슈 정벌 등의 전투를 하는 등 그야말로 실전에 능숙한 병법과 야전 능력이 절정을 달렸다.] 야인 및 여진족 토벌과 왜구의 준동이라는 한정된 경험 하에 최대한 [[검증]]된 장수를 기용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신립은 그 제한된 상황 하에서만 적합한 인물이었다.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이후 임진왜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에서도 손 꼽히는 최정예군이 단 1번의 전투로 몰살당하면서 선조가 도망가며 [[평양시|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밀리고[*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섬멸되어 패잔병조차 남지 않게 되면 후일을 도모할 수가 없으므로 현대전에서도 수색 섬멸은 중요한 작전 목표다. 패잔병은 적의 전술과 병력의 규모 등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정은 물론 각 지방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질 것이 뻔한 전투를 강요하여 병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남은 군사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말기에 잘 증명된 바 있다.] 이는 용인 전투에서 왜군의 습격에 50,000명 대군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용인 전투와 비교해도 탄금대 전투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결과로 용인 전투에서 도주한 병력들은 이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각지에서 소기의 군사적 성과를 얻고 일부는 대승을 거두는 공을 세워 치욕을 씻었지만 탄금대의 신립 휘하 중앙군은 그냥 다 죽어서 아무 것도 못했다. 같은 치욕이지만 향후 전황까지 감안한다면 탄금대 전투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되는게 당연하고 용인 와해는 병력을 보전한 채로 철수한 각군 지휘관 덕분에 후일을 도모한 것에 대하여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조령 [[떡밥]]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문경새재]] 지형이라는 요충지에서 왜군을 맞이했다면 최소한 탄금대처럼 하루아침에 다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후 평가 때문이다. 물론 신립이 다른 전장을 선택하였다 하여도 [[용인 전투]] 수준으로 와해되어 왜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탄금대 전투 수준으로 정예병사들이 몰살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쨌든 신립은 일본군을 얕봤고 조총 정보도 알고 있었으나 적절하지 않은 판단으로 치러진 탄금대 전투 1번으로 조선 8도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비상식적으로 불리한 전장을 선택한 탄금대 전투에 관한 가설 중 하나는 신립이 [[충주시|충주]] 방어를 포기하고 [[수원시|수원]] 등으로 군사를 물려 방어하려고 이동하다가 왜군에 의해 탄금대에서 전투를 강제당했다는 해석[* [[임용한]] 박사가 신립의 오랜 지휘관 경력과 [[인간]]적인 특성, 당시 기록과 정황을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보자면 신립이 먼저 방어 거점으로 건의받았던 조령은 당시 기준으로 방어전에 최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최초 방어 거점으로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월역에 이른 후 군을 물려 경유한 충주성에서까지 각각의 이유로 방어전 수행에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여 탄금대 옆 나루를 통해 병력을 도하하려고 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즉, 신립이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전장에서 적을 맞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임용한 박사도 이 [[전쟁]]은 매우 수치스러운 패배라고 언급했는데 다만 왜 전장이 강제되었는지 정확한 전황 분석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https://youtu.be/gcOF2btd-3A|#]]도 있지만 이 해석에서 역시 신립은 이미 왜군과 조우했던 이일의 직언과 왜군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무시하여 철수 시기를 놓치고 전투에 크게 불리한 탄금대에서 싸우게 되었다는 패전 책임은 면하지 못한다.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중요한 자리에서 섰음에도 시종일관 오만하게 굴다가[* <[[징비록]]> 등의 기록에서 출병 전후 왜군을 업신여기는 듯한 언행, 이일과 김여물 등의 건의를 묵살한 정황, 왜군의 조령 진입을 보고한 군관을 참수하고 조정에 왜군이 상주에 있다고 사실과 다른 보고를 한 것 등이 있다. 다만 왜군을 업신여기는 듯한 언행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쓰인 기록으로 보인다.] 심각한 패배를 당하여 본인의 [[명예]]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책임은 신립 본인에게는 애석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을 종합하면 소규모의 일선 부대 지휘관에 최적화된 능력의 한계와 인성적 결함, 전면전에 적합한 인사를 가려낼 방법이 없었던 당대 조선의 체계 자체의 한계가 겹쳐 한때는 체계적이지 않은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결국 철저한 침공 준비와 전국시대로 인해 실전경형이 풍부하여 신립의 식견을 넘어서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보여준 왜군 등이 겹쳐 모든 명성을 말아먹는 치명적인 패배를 하게 된 [[장군]]으로서 전술적인 임무 이상을 수행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신립 사후 [[조선]]의 당대 사람들은 신립을 쭉 비판해왔으나 2020년대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신립이 한계가 명확한 인물이고 조선을 대위기에 빠트린 패장이란 건 동의하나''' 그 한계 내에선 나름 분전했다는 옹호론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옹호론들의 근거를 살펴보면 현대의 군사학적 연구성과를 들어 당대의 기록들이 군사적 무지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전제를 깔기 때문에 신립옹호론에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과거와는 달리 신립이 마냥 기병만 믿고 무지성 개돌한 것만은 아니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신립의 판단은 분명히 틀렸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을 받는다. 탄금대 전투와 관한 평가와는 별개로, 신립을 [[똥별]]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지만 신립은 인격이 별로였던 인물이었던 건 맞지만 '''최소한 똥별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똥별이라 하면 실전경험은 전혀 없으면서 그냥 호봉과 정치질로만 올라간 정치군인들을 뜻하는데 신립은 최고지휘관으로는 무능했던 건 맞지만 '''신립은 적어도 정치질이 아닌 순수한 전장에서의 공훈만으로 최고지휘관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신립은 정치군인이 아닌 순수군인이기에 똥별이라 부르긴 어려운 인물이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니탕개의 난|이전까진 계속 잘해왔다가]] 한번 말아먹은 장군을 똥별이라 부르진 않는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자마 전투]]에서 패배한 [[한니발 바르카]]도 희대의 졸장이자 똥별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명장들도 패배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왜 그들을 똥별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이전까진 동북아 최고의 명장이다가 [[귀주대첩|막판에 참패한]] [[소배압]]을 두고 똥별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이일]]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점인데, 이일 또한 신립과 함께 북방에서 누비며 많은 활약을 해서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간 인물이고, 결국 최소한 똥별은 아닌 인물임에도 똥별이란 억울한 오명을 쓰고 있다.[* 신립이 정말로 똥별스러운 정치군인이었다면 총사령관은 커녕 군생활 몇 년 해보지도 못하고 파직당했을 것이다. 조선 조정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폐급 군인을 군대에 남겨둘 리가 있겠는가. --[[원균]]은?--그리고 앞서 말했든 신립은 그만한 군공이 있었기에 조정이 그에게 총사령관 직책을 맡긴 것이다. 단지 부대의 규모가 자신에게 맞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신립에게 가장 맞는 보직은 야전군 또는 집단군 사령관이 아니라,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연대장이나 아주 높이 쳐줘도 여단장 정도가 기량상의 한계로 보인다. 결국 계급이 낮은 보직에 최적화된 거 아니냐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전력으로 활약하여 전황을 뒤집는 임무부대의 중요성[* 신립은 북부에서 체탐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지휘하지 않았으며, 기동력이 높은 기병대를 이끌어 기동방어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했음을 볼때 특수부대(Special Force)가 아니라 임무 부대(Task Force) 성격의 부대를 지휘했다고 보는게 적절해보인다. 현재 국군에도 특수전 전담의 특공여단과 기동전, 돌파전을 전담하는 기갑여단이 편제상으로는 같은 여단이지만 규모와 임무성격을 볼 때 신립의 지휘경력에 빗대어 생각하면 기갑여단에 더 비슷하다 할 것이다.]을 생각해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도를 가진 보직이다.[* 조선의 경우 일개 개인의 무력 또한 꽤 도움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지금이야 징병제 혹은 모병제 하의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은 정말 막장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흔하지만 이 시대의 조선은 병농일치 수준이라 병사래봤자 일반 농민이 군사훈련 좀 받고 농기구 대신 무기 들고 싸우는 상황인데 이 상황 속에서 신립같은 혼자서 일신의 무용이 뛰어나 적 지휘관을 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타입의 사람은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싸우는데 밀리는거 같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하거나 서로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 투입할 와일드 카드로서는 적절한 셈.] 이 탓에 호사가들은 신립이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가 아닌 순변사를 맡고 도순변사엔 [[이일]]이나 [[김명원]] 같은 지장들을 임명하여 신립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휘를 받게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이 용맹이 부족하여 참패한 케이스가 많았던, 즉, 신립만 (돌격대장으로) 있었더라면 싶었던 상황이 많았던 만큼 신립이 단순히 무력만 뛰어나다고 최고사령관에 무턱대고 앉힌 당시 조선 조정의 판단이 아쉬울 뿐이다. 신립은 자신이 그 보직을 원해서 한 게 아닌, (결과와 별개로) 모두가 출정을 마다하는 상황에서 총대를 멘 인물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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