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사임당 (문단 편집) == 생애 == 신사임당이 속한 [[평산 신씨]]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군|영월]]군수, 부친 신명화는 [[벼슬]]을 일부러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증조부인 신자승(申自繩)은 멀게는 '''태종'''과도 인맥이 이어진다. 신자승의 장인인 남휘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외가 쪽도 이름이 상당히 높고 부유해서 엄청나게 강한 집안 내력이 있는데, 외조부 이사온만 해도 [[강릉 최씨]] 집안에 둘째 [[사위]]로 장가를 들었고 신명화의 경우도 이사온의 외동딸과 [[결혼]]을 해서 초년 생활을 처가 [[오죽헌]]에서 했으며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댁에서 [[교육]]을 받았다. 오죽헌만 해도 이사온이 장인에게 받은 것을 다시 사위인 신명화에게 넘겨준 [[재산]]으로 신사임당이 죽은 이후에 유산을 나눈 분재기를 보면 이 집안의 [[노비]]가 100명이 넘는다. 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였다고 하는데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세종(조선)|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했는데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쓴 사람 중 1명이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이다. 물론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입장이었으므로 신사임당이 이이의 어머니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림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이의 노선을 따르는 조선의 지파인 [[서인]]과 [[노론]]에 속한 정치인들에게는 집단 의식과도 같은 [[의례]]였다. 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논하며 스스로의 정치적 동질감과 소속감을 다졌다.] 그뿐만 아니라 먼 훗날 [[숙종(조선)|숙종]]도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다고 하니 그림 실력이 대단했던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뭐가 그녀의 그림이고 실제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대에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녀가 그렸다고 확실히 낙관을 찍은 그림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들만 잔뜩 전해지는데, 300년 전에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전해지는 작품이 너무 많고, 또한 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화풍이 너무 상이하다. 흔히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그렇게 전해지는 작품일 뿐 진짜 그녀가 그렸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아들인 이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포도]], 산수,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하지 초충, 화조를 그렸다는 기록은 없어서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남편 [[이원수(조선)|이원수]][* 명문가였던 신사임당의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남편 이원수의 집안은 한미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형제도 남매도 하나 없는 단 하나뿐인 외아들이었다.] [[덕수 이씨]] 가문 자체는 나름 명문가이지만, 정작 이원수의 집은 [[가난]]했다.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 신사임당에게 있어서는 시당숙.]이자 [[우의정]]인 당대의 세도가 [[이기(조선)|이기]][* 이기의 어머니는 [[성삼문]]과 6촌지간이며 외삼촌인 [[성담수]]는 [[생육신]] 중 1명이다. 이기는 후에 [[윤원형]]을 도와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된다.]를 찾아다니자 적극적으로 만류했다고 하며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으면 [[재혼]]하지 말라고 [[유교]] 경전까지 인용해 가며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 이 대화가 <동계만록>에 남아 있는데 [[공자]], [[증자(인물)|증자]], [[주자(철학자)|주희]]의 고사까지 인용한다. ]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4남 3녀)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원수(조선)|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이원수: "[[증자(인물)|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과일)|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이원수: "[[주자(철학자)|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남편의 말에 순응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여성이었는지 상당히 의문이 들게 만드는 대목. 하지만 남편 이원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장남 [[이선]]과 연배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자]] 권씨를 신사임당 생전에 [[첩]]으로 삼았고, 신사임당이 죽자 권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단, [[조선시대]]의 첩은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꼭 신사임당의 당부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첩은 정실 부인보다 [[신분]]이 낮아 남편에게 정실 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으며,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 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선과 새어머니 권씨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싸웠을 정도였고, 3남 [[이이(조선)|이이]]는 어머니의 탈상 후 이원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버렸다.[* 다만 이이는 그래도 형제들을 잘 달래며 상대적으로 새어머니 권씨를 존중했다. 그런데 훗날 [[제자]]인 [[정여립]]은 이이가 새어머니를 핍박하고 [[불효]]했으며 서로 으르렁거렸다는 악성 [[소문]]을 유포하고 다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