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사임당 (문단 편집) == 평가 == 시, 서, 화는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엄친딸]]의 표본. 괜히 슬하에서 이이 같은 사람이 나온게 아니며 신사임당 당대에는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나 '[[이이(조선)|이이]]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유명하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모양처라는 단어 자체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은 절대로 [[모욕]]이 아니지만 그녀 개인의 역량이 묻혀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동양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을 조명하는 어린이용 전기가 많았고 초충도 같은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서 예술가로서도 뛰어나고 가정생활도 잘한 먼치킨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냥 아들 공부 잘 시킨 엄마 정도의 이미지로 국한되었다. 사실 신사임당이 생존하던 [[조선]] 전기인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조선 후기에 비해 비교적 높았고 실제로 신사임당도 아들인 이이를 친정에 가서 낳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사회가 [[성리학]]적 관념화에 젖고 [[남성]] 중심주의의 [[가부장제]]가 공고해지면서 여성의 위치가 격하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신사임당 생존 당시나 16세기까지 [[지식인]]들의 시선에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보다 '화가 신씨'라는 점이 부각되었다는 것인데 소세양, 정사룡 등은 그녀의 그림에 관한 평을 다수 남겼고 그녀를 뛰어난 화가로 보았다. 신사임당에 현모양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송시열]]이었는데 송시열이 53세 때 발표한 아래의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을 보자.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 ><사임당화란발> - 송자대전 이런 송시열의 발문을 시작으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은 이이를 띄우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작업의 일환으로 그녀를 격상하는데 힘썼는데 이는 결코 독립된 개인으로서 신사임당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이의 주변 배경으로만 취급한 것이다. 이런 작업 속에 신사임당은 이정(二程)[* 2명의 정(程)씨로 곧 [[송나라]]의 대유학자인 [[정이]]와 [[정호]] 형제.]의 어머니인 후 부인에게 비견되는바 이는 이이와 이정의 위계를 은연 중에 동일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신사임당은 이로써 '화가 신사임당'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여성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시했고 기예들을 낮고 비천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신사임당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여성의 지위 하락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성리학이 근본주의적이고 경직된 구조로 나가면서 신사임당이 [[재능]]을 발휘했던 [[화가]]의 지위와 평가가 하락했던 점 역시 종합적으로 고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당대 기준으로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현모양처인 동시에 화가이자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재인이라는 점에서나 위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5만원권에 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다는 평가가 주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