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상사 (문단 편집) === 본격적으로 주먹생활을 시작하다 ===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53년 신상사는 육군 특무부대 [[상사(계급)|1등상사]] 계급으로 전역했다. 이 선택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1년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에서 더 머무른 그는 지역의 알아주는 주먹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대표적으로 씨름선수 출신 박치덕과 최시헌, [[대구 공군기지|대구 K2 공군기지]]의 [[군무원]] 갑빠가 그들이다. 특히 갑빠와의 결투는 "5분 동안 정신없이 때리고 보니 상대가 큰 대자로 누워있어 병원에 실어 보냈다."라고 회고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독립운동가]] 출신 [[이갑성]]이 [[자유당]] 후보로, [[이우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이우줄을 낙선시키라는 자유당의 특명이 하달되었고, 신상사는 경찰로부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이우줄 후보의 유세장에서 난동을 피우며 방해했지만 선거 운동원 수십 명으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했다. 선거 결과 역시 이우줄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405200023910203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5-20&officeId=00023&pageNo=2&printNo=9693&publishType=00010|1954년 5월 20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이와 완전히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신상사는 당시 [[무소속]] 후보였던 이우줄의 선거운동원이었다. 마이크를 밀어 쓰러뜨리고 소동을 일으킬려고 하다가 경찰에 구속되었긴 했는데, 사실은 [[자유당]] [[이갑성]] 후보측에서 꾸민 소동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꾸민 것이라고.] 그는 이때를 악몽 같은 순간으로 기억하며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54년 고향 서울특별시로 돌아온 신상사는 [[중구(서울)|중구]] [[명동]] 중앙극장 옆에 자리 잡았다. 곧이어 [[양정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주먹이 제일 강한 1진들을 휘하 조직원으로 두었다. 이후 명동황제 [[이화룡]]을 잡기 위해 을지로 태양다방에서 그로 지목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팼다. 하지만 피해자는 이화룡이 아닌 그와 닮은 전파사 사장이었다. 이 소문이 돌자 이화룡의 직계 이영복이 50~60명의 조직원을 이끌고 신상사의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이후 신상사도 5~6명의 부하를 이끌고 이영복의 집을 습격하는 등 항쟁이 계속되었지만, 이화룡의 또 다른 직계 박일갑의 중재로 양측이 화해했다. 이후 신상사는 일단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범 명동파의 행동대장이 되었다. [[https://m.cafe.daum.net/ssaumjil/LnOm/1643289?svc=cafeapi|신상사와 이화룡, 가장 오른쪽 인물은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 당시 명동파의 라이벌이었던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 [[유지광]] 휘하에는 신상사파와 달리 학창 시절 2진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신상사파 조직원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던 그들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명동 세력에 밀렸다고 한다. 1955년 신상사는 5명의 종로파 조직원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김응규라는 사람을 구해준 뒤 그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였다. 김응규는 종로파 두목 [[아오마스]]에 대한 복수심이 대단했는데, 신상사는 이후 아오마스가 국일관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를 찾아가 흠씬 두드려팼다. 당시 아오마스는 도망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세간에 국일관 사건으로 불리며 [[김두한]]의 후계자 아오마스가 새파란 후배인 신상사에게 개망신을 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1956년 신상사는 [[황금마차 습격사건]]에서 쳐들어온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박살 내고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저지른 뒤 도주하는 과정에서 명동파의 구역을 침범한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때려눕히는 등 두 조직 간 항쟁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러나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지만 상소하는 과정에서 형량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출소한 신상사는 명동을 기반으로 조직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에 서울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기존의 최강 조직이던 동대문사단은 [[5.16 군사정변]]으로 두목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가 사형당하고 남은 조직원들이 정종원과 [[유지광]]의 세력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전화위복으로 신상사가 무주공산인 서울을 접수하기가 쉬웠다. 특히 신상사는 5.16 이후 마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구달웅을 만났고 이후 그를 부두목으로 삼는다. 신상사는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의 중간보스 출신이자 니시야마 미노루란 이름으로 알려진 서순종과 권투 사업 및 여러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서순종[* 형이 이나가와카이의 최고 고문인 니시야마 테루(서휘)였다.]은 대한민국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권투선수)|김기수]]를 키워냈는데, 그 외에도 [[유제두]], [[박종팔]], [[박찬희#s-5]], 염동균, 김지원, 최점환 등 다수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서순종은 [[무하마드 알리]], [[마이크 타이슨]], [[조지 포먼]], [[에반더 홀리필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로이 존스 주니어]],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등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 권투계의 거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e/Don_King_by_Gage_Skidmore.jpg|돈 킹]]과 깊은 유대가 있다고 알려진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6693&cid=46667&categoryId=46667|전호연]]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 권투계의 황금기를 일구어냈다. 여담으로 돈 킹 역시 미국 암흑가 최고의 [[마피아]] 조직인 [[마피아/국가/미국|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로 잘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 이 시기 신상사는 구달웅을 두목 대행으로 삼아 대부분의 조직 살림을 맡기고 자신은 지방의 거대 조직이나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제휴하는 등 큰일에만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