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선우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용산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센터였고, [[박수교]]와 함께 [[연세대학교 농구부|연세대]]를 이끈 선수였다. 센터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인 188cm 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제법 큰 키였고, 무엇보다 농구 센스가 좋아서 작은 키를 커버했다. 특히 골밑에서 외곽으로 적절할 때 빼주는 패스가 일품이었다고. 신선우가 특별했던 점은 [[중앙대학교 농구부|중앙대]]의 [[한기범]]과 [[김유택]]이 등장하기 이전 우리나라에서 센터는 골밑에서 궂은 일을 하고 스크린이나 서주는 장승같은 역할이 고작이었는데, 그런 기존의 센터들과는 격이 다른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포인트 가드보다 공을 더 많이 소유했고, 하이 포스트로부터 패싱력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던 올라운더였고, 자신이 맡은 상대팀 센터를 꽁꽁 묶어버리는 수비력은 물론, 패싱 레인까지 차단하며 많은 스틸까지 유도해내는 빅맨이었다. 신선우는 단 10점만 득점하고도 경기를 장악했다는 소리를 듣던 특별한 센터였다. 그러나 선수로서는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지만,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잦은 부상 때문이었다. 이미 대학교 시절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는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선수로서의 기능이 치명적으로 떨어졌다. 결국 1979년에 가면 일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재활에만 매달리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비록 1977년에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이 무릎 부상으로 인해 뛰어난 활동량은 절반으로 감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부상에 대한 재활 끝에 [[1982년]]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코트에 복귀할 수 있었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표로 합류해서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1등 공신으로 활약했다. 신선우는 장신의 중공 센터진을 거의 홀로 초토화시켰고 영리한 플레이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또한 팀에 신동찬, 박수교라는 리딩 가드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상대팀 진영까지 볼을 운반하는 것도 신선우였고 신선우가 박수교에게 공을 넘겨 주면 신선우가 다시 하이포스트에서 공을 건네받고 박수교, 이충희, 신동찬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점에서 오픈 찬스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또한 중국의 무태추가 나오지 않았던 시기였어서 이길 수 있기도 했다.[* [[허재]]가 이 게임을 보며 유일하게 감탄했던 선수 또한 신선우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얗게 불태운 결과였고, 또 다시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결국 신선우는 [[198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활약해서 1983-84 초대 [[농구대잔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고 은퇴는 했다. 참고로 연세대 출신 중 삼성의 선수이자 기아의 코치였던 동기인 [[박인규(농구)|박인규]]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