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숙(1885) (문단 편집) === 천도교 신자가 되다 === 1903년 12월, 신숙은 동학에 입도하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백했다. 부모는 나라가 엄히 금지하는 동학에 가담한 그가 죽을까봐 눈물로 말렸고, 그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기 어려워 배교한 것처럼 행동하며 조용히 지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동학교도들은 '진보회'를 조직한 뒤 일제히 두발을 자르고 서양식 의복을 착용하며 개화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신숙은 이 소식을 듣자 자신도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1905년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신숙은 경무청에서 세운 경무학교에 입학하여 3주간 훈련을 받고 순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순검으로 재직하면서 대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야학으로 법률도 전공했다. 경무학교 특과생에 당선되어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당국이 승진 약속을 지키지 않자 순검을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국민신보> 기자로 취업했지만, <국민신보>가 친일적 성향을 보이자 반년 만에 사직하고 1907년부터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취업해 4년간 근무했다. 이 시기 애국적 지식인들은 민족 계몽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도 여기에 동참해 인쇄국에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을 맡아 육영사업에 진력하면서 애국단체를 찾아가 강연을 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훗날 천황을 노린 의거를 단행한 [[이봉창]]이 문창학교 출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