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숙(1885) (문단 편집) === 상하이 === 1920년 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중앙총부에 천도교 대표 한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 신숙은 선천교구장 이군오(李君五)와 의주대교구장 [[최석련]] 등을 만나 상의했다. 이들은 이미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崔東午)․김의종(金義宗)․이민창(李民昌)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신숙은 두 사람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출국하여 활동하라"는 권유를 받고 4월 23일 극비리에 신상태(申相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상태]]와 동명이인이다.]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만주에서 비밀연락장소인 삼산상회(三山商會)에 들어가 한동안 은신했다가 상하이에서 온 장경순(張敬順)의 안내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상선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신숙은 [[안창호]]를 만나 만주 지방에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개척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안창호가 이를 승낙하자, 신숙은 몇몇 동지를 국내와 대련으로 파견해 자금 2백원을 마련하게 했다. 그러나 대련으로 보냈던 동지가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이 발각되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이후 신숙은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 김의종, 김홍선, 장경순, 이민창 등과 함께 천도교상해전교실(天道敎上海傳敎室)을 설치했고, <천도교사실(天道敎事實)>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천도교 포교활동에 진력했다. 이와 함께, 그는 천도교의 이념에 입각한 통일당을 조직했다. 통일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국민의 마음과 힘을 통일시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신시대 신이상에 기초한 신국가를 건설한다. >둘째, 인본주의를 창명하여 구천지 구사회를 신천지 신사회로 개조하고 조선적 신문화를 세계에 건설한다. >셋째, 전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강권을 배제하고 세계의 대동을 실현한다. >넷째, 산업 및 교육의 새로운 설비를 도모하고 인류공동생활의 행복을 증진한다. 통일당은 총리에 신숙, 정치부장에 최동오, 경제부장에 김의종, 문화부장에 이민창을 각각 선임했다. 이즈음 만주 각지에 무수한 독립단체가 난립하여 서로 갈등을 빛었다. 신숙은 이들을 통합시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0년 9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 [[박용만(1881)|박용만]] 등과 더불어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시켰다. 이후 1921년 4월 노령, 북만주, 하와이 및 국내 등지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베이징에 모여 서직문(西直門) 밖 삼패자화원(三牌子花園)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통일당 대표로 참석한 신숙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박용만, 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 구성을 시도했다. 또한 신성모(申性模), [[황학수(독립운동가)|황학수]] 등과 함께 통일당의 대표로서 당시 미진한 활동을 보이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때 신숙은 국민대표회의 주최 순국선연추모행사 준비위원과 회규기초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월 31일 개막식에서 [[안창호]], [[김마리아(1891)|김마리아]] 등과 함께 연설하고 의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창조파의 중심인물로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국민대표회의를 독립운동을 전반적으로 인솔하는 최고기관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사수하려는 개조파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해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5개월간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1923년 6월 3일,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발족시켰다. 신숙은 이 정부에 가담해 외무위원장 [[김규식]], 군무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윤덕보, 경제위원장 김응섭과 더불어 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1923년 8월 20일 김규식, 지청천, 윤해, 원세훈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코민테른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블크를 비롯한 소련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원조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국내 정치문제로 외국의 사정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진 소련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25년 3월 만주 길림으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