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숙(1885) (문단 편집) === 만주 === 그가 만주에 이르렀을 무렵, 만주의 독립세력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분리되었고 국제공산당과의 교섭도 원활하지 않아 효과적인 독립운동이 어려웠다. 이에 신숙은 독립운동은 일단 접어두고 천도교의 포교사업에 전념해 액목현 교하에 정착하여 천도교납법구총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새로운 운동방략을 모색했다. 이듬해, 그는 가족들과 하얼빈에서 재회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하얼빈, 이도하자 등에 있는 중국인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927년 2월 이도하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현지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민부의 민정위원장 최호(崔顥)가 찾아와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통합을 위해 신민부의 전권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숙은 이를 수락하고 신민부 민정위원 자격으로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7월 중동선 위하현에서 신민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당했을 때, 신숙은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석권하고 1932년 3월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시켰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신숙은 한국독립군 참모장 자격으로서 남대관(南大觀)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호로군연합사령부(護路軍聯合司令部)와 접촉하여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합의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 중로연합군(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으로 편제되었고, 신숙은 참모직을 맡았다. 이어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 보병 제8여단 23단의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결성하고 결박호, 팔도하자, 동경성, 양모림,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공세와 한인사회의 와해, 그리고 동북항일의용군 일부부대와의 갈등 등 여러 악재가 터지자,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숙은 만주를 떠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남기를 원하는 4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오상현 사하자의 자치단장 심경산(沈慶山)의 도움으로 한인 농촌에 분산 주둔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중국정부 고위층과 면담을 추진해 독립군을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1933년 2월 김상덕(金尙德)과 함께 남호두를 출발, 4월 초 장춘을 거쳐 봉천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국내로 잠입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의 동지들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은 뒤 안동, 대련, 천진을 거쳐 5월 말에 상하이에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