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숙(1885) (문단 편집) === 이후의 독립운동 === 신숙은 상하이에 돌아온 뒤 신한독립당의 [[윤기섭]], [[신익희]] 등과 만나 한국독립당과의 합당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으며 20여 명의 기자를 초청해 한국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발표했다. 그는 난징으로 가서 중국정부의 후원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있다가 왕덕림(王德林)이 유럽을 순방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상하이로 달려와 [[이범석]]의 소개를 통해 왕덕립 부대의 부대장 공헌영과 면담해 그로부터 6백원의 후원금을 얻었다. 또한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온 김규식으로부터 5백원을 지원받았으며, 이를 베이징으로 가져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전달했다. 1933년 11월, 신숙은 베이징에서 가족과 만났고 거기서 1935년까지 거주했다. 그러다가 1935년 말 만주에서 자신을 찾아온 장남 신원균으로부터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다가 12월 4일 영구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내리던 중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보름동안 취조를 받고 길림 일본 영사관 경찰서로 인계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신이 일개 중국인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끝내 노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후 일본 형사들의 감시 때문에 더이상 독립운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길림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교민들의 생활 개선에 집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