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황사영 백서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황사영 백서 사건)] 천주교인인 [[황사영]] 알렉시오는 어린 시절 수재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후 어째서인지 과거를 보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정조가 손을 잡고 격려까지 할 정도였으며, 황사영은 정조가 잡은 손을 붉은 천으로 둘러 싸매고 다녔다고. 위인전 특유의 부풀린 이야기일 듯. ~~근데 황사영은 역적이잖아~~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의 한 동굴에 피신해 있었다. 친족과 친구들이 모두 당하고, 도피생활에도 지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비단]]에 전갈을 적어 북경에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에서 벌어진 이례적인 박해를 설명하고,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청하려 하였다. 문제는 도움의 내용이다. 1. 조선 신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 1. [[청나라]]의 황제에게 청원하여 조선의 천주교를 합법화. 1. 2가 통하지 않을 경우 청나라에 의한 조선의 속국화.[* [[원나라]]처럼 조선 왕을 사위로 삼아주던가, 아예 조선 왕을 폐하고 청나라 [[친왕]]을 한 사람 보내 조선 왕 자리에 앉혀달라고 했다!] 1. 3이 통하지 않을 경우 서양 군대에 의한 조선점령. 안타깝게도 황사영의 요청 중 실현가능성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었고, 이딴 걸 보호하겠다고 조선을 공격한다는 건 어림 반푼어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당시의 청나라는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내전상태였기 때문에 조선 내정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황사영은 중국에서 신부가 배출된 것을 보고, 중국은 천주교를 보호하는 국가라고 착각한 듯하다. 그러나 중국은 유교 본고장인만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당연히 나쁘면 나빴지 좋을 리 없었다. 애초에 청은 건륭제 때부터 천주교 탄압을 진행한데다 건륭제는 준가르, 문자의 옥의 사례처럼 청의 통치를 건들면 절멸 수준으로 박살내는 것도 거리낌없이 해왔다.] 서양의 [[가톨릭]] 국가들은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파란으로 말미암아, 지구 반대편에 신경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기독교 국가로 가면 언젠가 [[조선]]을 침략할 명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그 당시에는 혼란기라서 올 처지가 못되었지만 만일 편지가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무사히 도착하고 후에 혼란기가 수습된다면 프랑스에서 조선에 올 명분이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황사영은 프랑스에게 조선을 각인시켜 "아, 조선에는 이교도 정권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는구나. 그래서 우리의 지배를 받고 해방되고 싶어하는 민중들이 많나 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이고 [[백인의 의무]] 같은 경향이 있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도 가톨릭 박해 문제가 구실이 되었다.[* 사실 베트남만이 아닌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로 삼는데 종교를 빌미삼는 일은 많았다. 심지어 미국은 인구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며 당시 대통령인 매킨리가 하느님의 계시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병인양요]] 때도 선교사들이 "전함을 [[한강]]에 띄워 진격하면 천주교인들이 환영하면서 조정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만 와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들의 말은 철저히 헛소리다. 사실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병인양요때 서구 세력을 도운 천주교도 셋이 있긴 한데 이보다 이전의 인물인 정하상 같은 경우는 나라를 엎는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 천주교를 공인받으려고 했던걸 보면 이쪽은 비주류로 봐야 할 듯하다. 그리고 조선의 천주교 교세가 병인박해 시절에는 처형당한 교인이 8천명이 될 정도로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천주교가 나라를 엎어버릴 정도의 세를 갖췄다기엔... 글쎄?] 이 편지가 조선이 프랑스(혹은 다른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가 됐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사영]]은 서양 군대의 강력함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특히 전투함이 매우 거대하며 조선의 전력으로는 상대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보다 수십년후 터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군은 정말 제대로 털렸다. 어찌저찌 이겼다고 평가받긴 하는데 이것도 침략군 측에서 알아서 물러나준거지 정말 전면전으로 갔다면 처참하게 털렸을 것이다.] 황사영이 서양에 최종적으로 요청한 이게 큰 대(大)에 배 박(舶)자를 써서 대박인데… 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편지가 [[국경]]을 넘지도 못하고 걸려버린 것. 원래 [[노론]]에도 친정조 온건세력인 [[시파]]가 존재하였고, 왕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에 속했다. 이들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박해를 방관하는 입장이었다.~~애초에 조정관료치고 천주교 옹호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당장에 정조대에 남인인 채제공도 천주교에 대해 임금과 부모를 업신여기고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핑계삼아 남인 및 시파 계열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남인을 모조리 처벌하라는 몇몇 신하들의 요구를 7달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벽파들조차도 기존의 정조식 처리(일종의 [[후미에]])를 고수하여 일반 신자들은 굳이 죽겠다는 사람만 두들겨 패고 나머지는 거의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앞서의 "무부무군"과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극렬 반체제세력임이 증명되어 버린 셈이다.~~트롤러~~ 이를 계기로, 남인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터지게 된다. 사실 황사영 백서의 주장은 궁지에 몰린 개인의 공상적인 내용들로 그것이 천주교인들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허나 그런 거 알 거 없이 조선의 천주교 대책은 탄압으로만 흐르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므로, 나름대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정약전]]([[정약용]]의 둘째 형) → [[정약종]](정약용의 셋째 형) → [[황사영]](정약용의 맏형의 딸과 혼인) 순으로 포교가 진행되었기에 당시 이미 귀양간 상태였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비롯한 남인의 핵심인물들을 다시 국문해 처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미 분 놈들은 빨리 사형시키고, [[만악의 근원]]인 정약전을 [[포항]]에서 절해고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남도]] 땅끝으로 귀양지를 재배치해 사건의 확대를 막았다. 더불어 [[이승훈 베드로|이승훈]] → 정약종 → 황사영으로 위 순서를 바꾸어 이승훈이 다 뒤집어 쓰게 된다. 신유박해에서 '배교한 것 같은데 죽은 사람'과 '배교 안 한 것 같은데 산 사람'이 생기게 된 것은 신자를 많이 불 것 같은 사람을 일찌감치 죽인 정순왕후의 대처 탓이 크고, 사회지도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까지 많이 죽은 것은 눈치 없이 [[가톨릭]] 신자가 맞다고 순순하게 말하지 않으면 살려준 정순왕후의 깊은(?) 뜻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신자라고 증언해 줄 사람이 이미 죽어 이후에 잡힌 사람은 본인이 가톨릭 신자라고 본인이 자백하기 전에는-- 증거불충분으로 잡혀가-- 죽는 일은 드물게 되었다.[* 아마도 끝까지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진짜 가톨릭 신자로''' 보였을 것이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는 진짜 아니거나 맞다고 쳐도 가톨릭을 버릴 이들로 보았을 듯하다. 실제로 끝까지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온갖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하고 설령 잠시 배교를 택해도 곧바로 철회하였으니 누가봐도 천주교 신자로 보일만도 했다.] 실제 전북 충남 일대 신자 200명이 밝혀지는 초대형 병크가 터지자 소외(?) 신앙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유항검, 유관검 일가를 모조리 참형하고, 신자 200여명에게 앞으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대부분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정약용도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니 반박할 증거가 없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심지어 신앙을 유지한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 되는 [[정약전]]도 본인이 대놓고 신자라는 증거를 내놓지 않으니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승훈은 정약용(정약전)의 친누이와 혼인한 매형, 황사영은 정약용과 정약전의 조카사위였음에도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살아 남았다. 이승훈과 정약종은 증거가 워낙에 확실해서 죽었지만 그 둘만 죽었을 뿐, 막상 사위를 잘못 둔 정약현(황사영의 장인)은 유배조차도 가지 않았다.[*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래도 다달이 10명씩 처벌한 것이 쌓여 결국 사형(사약, 능지처참, 참형)당한 사람이 100명, 유배 및 삭탈관직이 300명에 달하는 대형참사가 벌어지게 되자, 결국 정순왕후는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였다.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歲前)[* 한 해가 끝나기 전]에 끝내며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리게 된다. 이 교문 반포가 참 절묘한 게, 신속한 사형 집행을 명함으로서 더 이상의 사건 확대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 애매한 반포 시점으로 인해 추가적인 조사도 곤란하여 더 이상의 수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즉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도록 하는 정순왕후의 의도가 담긴 것.~~정순왕후: [[남인|죽일]] [[시파|애들]] [[숙청|다 죽였으니]] 이제 좀 자제하자~~[* 역대 조선의 사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대적인 숙청은 과거의 중요시되었던 노동력과 관련이 있어서 이만 끝냈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 그만큼 많이 숙청했는데 천주교인 생존자들이 많이 남았을 가능성도 없고 있어도 다시 재기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이제 내버려둬도 상관없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