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의주시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경의선 개발 이전까지 [[의주군]]과 역사를 같이하던 곳으로 [[고구려]]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이나 [[고려시대]]에는 [[거란족]]의 점령을 받았던 [[강동6주]] 지역으로, [[제1차 여요전쟁]] 당시 [[서희]]가 외교담판을 통해 되찾았다. 이후 19세기까지는 [[의주부]] 관할이었다. 원래 신의주라는 지명은 없던 지명이다. [[일본]]이 [[1904년]]에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 [[경의선]]을 급조하면서 [[1905년]]에 '새로운(新) 의주'라는 뜻에서 만든 곳이다. 이 당시 행정구역은 [[의주군]]([[의주부]]) 광성면 신의주동이었다. 신의주는 20세기 초만 해도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저지대로, 농사도 포기한 버려진 갈대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일제가 대륙 침략 기지로 개발하면서 시가지 주위에 수차례에 걸쳐 이중으로 제방을 쌓아 시가지를 이루게 되었다. [[1914년]]에 [[일본 제국|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의주군에서 분리해 신의주부로 승격시켰다. 비슷하게 일제가 [[안주시]]에 세운 [[신안주]]도 있다. 존재하는 지역의 일부 혹은 외곽을 새로운 도시로 발전시켜 새로운 도시이름이라고 이름지었다는 면에서 [[영국령 인도]]에 의해 지어진 [[델리]] 북쪽 [[뉴델리]]시와 유사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의주부 지도를 보면 [[https://library.korea.ac.kr/oldmap/?id=461502023|#]] 현 신의주 시가지 지역이 '고읍면'으로 편제되어 있다. 즉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나 과거 의주의 읍치는 현 의주읍이 아니라 현 신의주 본시가지 혹은 인접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경의선]] 철도 때문에 [[의주군]]에 있던 [[평안북도청]]이 1924년 신의주로 이전되었다. 당초 신의주부의 관할 지역은 제방 안쪽 면적인 6.2 ㎢([[여의도]]의 대략 2배)에 불과했으나, 1941년 행정구역 대확장으로 17.7배 확장된 109.7 ㎢로 면적이 크게 늘어났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42482|#]] 1945년에 [[8.15 광복]]을 맞으면서 신의주부는 신의주시로 개칭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초의 반소 항쟁'이나 [[2.28 학생민주의거]] 같은 학생의 정신을 상징하는 의거로 기념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라는 봉기가 [[소련군정]]기에 일어나기도 했다. 20명 이상이 사망한 광복 이후 현재의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된 최대의 시위다. 당시만 해도 신의주를 비롯한 [[평안도]]는 우익이 우세한 지역이었다. 다만 이곳의 경우 좌익에게도 아주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봉기에서도 공산주의라는 미명하에 숨은 악덕 분자를 문제 삼았다는 시각도 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11/04/LK7CNGWTF5HX5GGO6EPEZWR3MU/|#]] [[6.25 전쟁]] 때는 [[이북 5도]]의 다섯 도청 소재지 중 국군이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도시였다.[* [[청진시]]는 11월 25일 일시 점령.] 전쟁이 끝난 뒤로는 2~3년마다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1970년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현지지도 교시에 의해 중앙에 의한 대대적인 개발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신의주를 국경 관문 도시, 다시 말해서 접대·선전용 도시로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간 5천 세대 주택 건설, 신의주-남신의주 지하철 건설, 평양 금수산 여관에 준하는 대규모 여관 신설, 신의주공항의 민간공항 전환과 외국인 입국 초대소 설치 등의 세부계획이 수립되었다. 실제로 신의주시는 [[청진시]]나 [[함흥시]]처럼 직할시 승격 이력이 없음에도 1989년 12월 강안구역, 남구역, 광명구역 등 3개 구역이 설치되는 등 대대적인 개발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신의주가 대외 선전용 도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이 개발사업은 흐지부지되었다. 1989년에 설치되었던 구역들 역시 1991년에 폐지되었다. 그래도 [[중국]]과 인접해있다는 특성 때문에 1990년대 이후의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잘사는 축에 드는 도시이기도 하다. 중국산 제품들이 신의주를 통해 [[평안도]]-[[황해도]]까지 이어지기까지도 하니. [[김정일]] 시대 때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북한의 [[홍콩]]으로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목표 하에 중국인 사업가인 39세의 양빈이 전격적으로 부총리급 행정장관에 임명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중국 측이 양빈을 체포하여 18년형을 선고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양빈이 부임했어도 딱히 경제적 메리트가 없는 신의주가 북한의 홍콩이 될리는 만무했겠지만. 이후 북한은 [[박태준]]에게 후임 장관 자리를 제시했다는 풍문도 돌았는데 결국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특구 지정이 해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