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일선 (문단 편집) == 기타 == 1983년 신일선의 불행한 말년[* 재혼하여 얻은 의붓아들이 [[미국]]에서 적은 액수나마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고, 결국 돈이 없어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는 형편이었다고 한다.]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1220032920203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1-22&officeId=00032&pageNo=2&printNo=11482&publishType=00020|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수혜를 본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문예봉]]이다. [[월북]]한 문예봉은 1960년대 말 숙청되어 [[안주시]]협동농장으로 쫓겨 났으나, 신일선의 소식을 접한 [[북한]]에서는 문예봉을 잘 대해주어 선전공작에 이용하고, 신일선을 불행하게 방치한 남한을 비난하기 위해 문예봉을 복귀시켰고, 이후 [[김일성]]과 [[김정일]] 돼지부자에게 충성을 다 바친 문예봉은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문예봉]]의 팔순잔치 상을 [[김정일]]이 직접 하사(?)했을 정도다.] 신일선의 사연이 보도 되지 않았다면 복귀하지 못하고 안주협동농장에서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일선은 <아리랑>의 배우로서 나운규와 [[한국 영화]]사 초창기에 대해서 많은 증언을 남겼다. 이는 오늘날 나운규와 그의 영화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나운규가 만든 영화의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그의 영화를 보았던 세대들도 다 죽고 없는 요즘에는 특히...] 한편, <아리랑>을 나운규가 연출한 게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했다고 주장하는 영화평론가 [[조희문]]에 따르면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면서 남긴 증언에는 잘못된 기억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라지만... 혐한도 안할 헛소리를 하는 통에 진위여부는 저 멀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