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정통주의 (문단 편집) === 가톨릭 측의 비판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64057&path=201307|#1]]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65269&path=201307|#2]],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66442&path=201307|#3]] 추기경. 가톨릭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본래 예수회 출신이었으나 재속 수도회인 ‘요한 공동체{{{-2 (Johannesgemeinschaft)}}}’를 돌보기 위해 탈퇴했다. 학창시절 스위스에서 중년의 칼 바르트를 만나 깊은 대화를 통해 영향을 받았고 최초로 칼 바르트에 대한 연구서를 쓴 인물이다. 이후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사상을 연구하여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간직해왔던 신앙의 미적 감각과 체험 전통을 부활시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대작을 서술하였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끈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과는 친구사이이다. 그는 개신교 변증법적 신학에서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 것과 가톨릭의 신스콜라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오리게네스]]의 영적감각론을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리고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군 폭탄"이라 묘사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여담으로 발타사르는 사적으로는 칼 바르트와 매우 친했고,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는 바르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바 있다.("저는 비록 바르트 교수님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쇤겐 신부님에 의해서 이미 그분의 팬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성장하게 한 신학의 스승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바르트 역시도 학생들에게 라칭거의 책을 추천했으며, 이 셋은 여행도 함께 다닌 사이다. 자세한건 [[베네딕토 16세]] 문서 참조.]를 필두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를 연구하고 장점과 단점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신정통주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예언자적 정신으로 당시 독재정부와 군국주의를 지향하던 교회를 향한 비판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는 본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의 유산을 들고 나왔으며, 이들의 등장은 이후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로 불리어지는 신흥종교 집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그들이 이를 의도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니 역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에 강렬한 정통으로의 회귀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성과를 빚은건 사실이다. 또한 칼 바르트와 같이 키르케고르의 신앙주의 노선을 추구한 신학자들은 가톨릭 대화주의의 입장과 달리 하느님의 전적인 주권, 전적 타자설을 강조하였고, 그렇기에 부차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세상에 있는 인간실존을 무가치 한것으로 경도되게 한 데 공헌했다. 물론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에서 이를 변호하면서 신앙의 유추 안에 존재의 유추를 포함시킴으로 가능하다는 전제를 했지만 이는 상당히 신범론(Theopanism)에 가까운 해석이다. 신학에서는 항상 이것이 문제였는데, 신의 영역을 강조하면 인간이 도저히 신에게 다가갈 여지가 없어지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면 신이 인간과 같은 언어와 사고를 하는 듯한 문제를 야기한다. 바르트는 전자를 좇았기 때문에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