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정통주의 (문단 편집) ==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신정통주의 == 초기 [[기독교]]가 형태를 갖추는 동안에는 당시의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조로아스터교|페르시아 종교]] 등으로부터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 어떤 신학이론이나 세계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기독교를 믿었던 로마인들이 다음의 종교들에 융화, 심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인간관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이원론적 체계 안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무질적인 것, 영과 육, 성과 속,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분리가 일어나고, 이 이원적인 분리의 시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본다. 이원론적 분리의 사고는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영향을 끼치며 중요한 사고의 유형으로 남았다. 기독교 전승 속에서 이 이원적 요소는 서로 대립적으로 인식되었다.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은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낮게 평가되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통전적으로 함께 생각하거나 적극적인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후 이성의 영역이 확대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세계 내적인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물질적인 것에 집중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삶의 관심과 목적은 ‘이 세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위기감을 느끼고 영적인 것을 강조했지만 사실은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저 세상을 강조했다. 교회가 실제적으로 영과 육의 통전적인 조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공허하게 ‘영’에 대한 강조만 반복하는 동안 이 세상에 ‘실재성’을 빼앗겨버렸다. 교회는 이제 개인의 영성을 돌보는 종교적 역할만 남았다. 한편, 계몽시대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면서 유럽은 자신에 차 있었다.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 더 많은 것을 찾아냈고, 과학에 의해 한 세기 전에는 불가능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 인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지상낙원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연과 사회는 모두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는 듯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제국주의는 넓게 세력을 확대했다. 현재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졌고 경제적으로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 [[성서비평학]]과 비판적 이성을 통해서 개개인의 체험과는 다른 본연의 진리를 성서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들의 모습에서 부르주아 이상주의, 역사의 진보,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의 역사 인식은 당시 유럽이 가졌던 시대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19세기 말, 겉으로 드러난 안정과 발전, 평화와 진보의 모습 아래는 인간의 오만과 함께 위기가 감추어져 있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위대한 학문적 결실을 거둔 것 같지만, 19세기는 진정 위기의 시대였다. [[1914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들이 믿고 갈구하던 평화와 사랑과 이상사회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한 위대한 발명품들은 모두 살상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잘못된 인간 사회와 그들의 정책을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스스로를 두둔하고 정당화함으로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잃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믿었던 역사의 끝없는 진보, 인간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평화,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 윤리관을 통해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이상, 이 모든 것이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꿈의 마지막은 전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정책을 지지한다. 1914년 8월에 발표된 "93 지식인 성명서"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쟁지지 성명의 초안은 바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하르낙에 의해 작성되어 발표되었다. 당시를 대표하던 신학 교수들도 이 성명서를 지지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인식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결국 모더니즘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종말을 고하고 자유주의 신학 전통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19세기에 출현했던 자유주의적 성경주석과 신학의 역사비평적 접근은 급진적인 정치적, 과학적 도전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그 이후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 실존주의적 접근방법을 하나의 혹실한 새로운 성찰방법으로 여겨 이를 환영했다.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영향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 첫째, 진정한 삶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실존적 가능성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설명은 루돌프 불트만과 다른 신학자들에게 이 실존적 상황에 상응하는 새로운 신학적 강령들을 발전시키도록 촉구했다. * 둘째, 언어에 대한 그의 성찰은 신학에 있어서 하이데거를 재차 환영케 했다. "신해석학"이 그것이다. * 셋째, 인간존재의 해석학적 조건에 대한 하이데거의 총체적 통찰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계속적인 신학적 성찰에 영향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적 문헌을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다루는 방법을 초월한 인간학적 토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성경 메세지와 이 세상의 재해석된 인간의 현존재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들이 같은 열정으로 공유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독일계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자신의 동료들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데 반하여 자신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신학에 심각한 위험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