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종(송) (문단 편집) === 재위 기간 === 당시 [[북송]]은 평화로운 듯 하면서도 여러 가지 모순에 빠져 있었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서하]]와 [[요나라]]에 바치는 막대한 세폐, 관료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관료제 유지 비용 증가, 황실의 비용 증가, 군사비 지출 증가 등으로 인한 재정 적자였다. 이러한 재정 적자는 자연스레 농민들을 압박했고, 농민들은 지나친 세금을 견디지 못하거나 대지주들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기며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신종은 이러한 송나라 내부 사정과 북방 민족에 억눌리고 있는 송의 현실을 타파하고 싶어했다.[* 사실 이런 문제 인식을 위해 인종 경력연간에 범중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1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버지 영종도 이 부분 문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부분을 조정에서 논의했다. 하지만 영종은 병약하여 이를 실행하려던 찰나에 붕어했다.]. 특히 그는 [[당태종]]처럼 송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군사력을 키우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국고였다. 당시 북송의 국고 부족 현상은 사마광의 지적처럼 진종 무렵부터 시작돼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친 재정 낭비로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종의 뜻대로 되기 위해선 재정 확보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당시 조정의 중신들이던 문언박, 한유, [[사마광]] 등은 긴축정책과 함께 신중론을 주장하며 젊은 황제가 구상하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했다. 이에 신종은 개혁의 적임자를 찾았고 [[왕안석]]을 추천받아 파격적으로 한림학사로 임명하고, 그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신종은 왕안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자신이 당 태종같은 정치를 하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때 왕안석은 신종에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라고 지적하면서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요순의 정치를 따르지 않느냐고 했다.] 신종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 아래 왕안석은 여혜경, 소철 등을 새로 꾸려진 개혁 기구에 배치했고, 세수 파악을 위해 유이 등을 조사단에 넣어 전국 각지로 파견했다. [* 왕안석이 직접 꾸린 조사단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그동안 개간된 땅들과 징수대상에 없던 농지들을 찾아내 실제 성과를 얻었고 이때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이전 세수보다 몇배나 많이 국고를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세 운반 과정에서 새로이 상어방이 형성되고 중간 상인들이 성장하는 성과도 얻었다, 그러나 조사단들이 전국을 돌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리사욕을 채웠기에 정작 농민들은 이들을 파견한 왕안석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이후 왕안석은 부국 강병을 목표로 '''신법'''을 실시했다. 그 신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묘법, 시역법 (市易法)'''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저리로 융자를 공급하여 고리대금으로부터 보호. 청묘법의 경우는 농사 자금을 상평창에서 빌려주는 것인데, 이는 신법당의 [[구양수]]조차 반대했다[* 사실 청묘법은 산서 등 일부 변경에서 극히 일부 시행되고 있었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왕안석은 청묘법을 처음 신종에게 입안하면서, 하북 등에서 먼저 시범 운영을 하고 이후 전국적 시행을 건의해 밀어붙였다. 그러나 청묘법 시행에 필요한 비용들을 모두 농민들에게 전가하고 자금 대출이 필요없는 농가까지 억지로 빌리게 하는 등의(삼정의 문란 시기 환곡의 문제와도 비슷하다.) 문제가 계속 터지자 하북 농민들이 당시 하북 사람들에게 공평정대한 판결로 명망높던 한기에게 “제발 청묘라는 법 좀 없애주십시오. 저 법때문에 못 살겠습니다”라고 집단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이후 한기는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하북일대를 돌면서 진상 조사를 했는데 백성들의 아우성 이상으로 문제가 많자 상소를 올려 청묘법 폐기를 주장했다. 조정에서 한기의 상소문을 보고받고 상소를 읽은 신종은 몹시 놀라 “과연 한기는 충신입니다”라는 말을 한 뒤, 취지와 달리 백성들을 가렴주구하는 청묘법을 없애라고 했다. 이때 신종의 명을 들은 왕안석은 신종 앞에서 한기를 상홍양에 빗대 신종과 한기를 모두 비난했고, 퇴궐 후에도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시역법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왕안석 주도의 신법(희녕변법) 당시부터 가장 논란이 컸던 것이 바로 청묘법이었다. 취지와 달리 소상인, 소작농 등의 삶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이 제도를 악용해서 부정부패와 농민수탈이 더 심해져서 당시 조정에서는 ‘청묘법은 말 그대로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정책이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사마광은 가장 폐단이 큰 청묘법부터 즉시 폐기조치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함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셈] * '''보갑법''' 10가구를 1보, 5보를 대보, 10대보를 도보로 편성. 농민을 치안 유지 조직의 구성원이 되게 하고, 농번기에 군사 훈련을 받아 병농일치의 민병 조직을 발전시켜 군사력을 강화하고 양병비 절감.[* 이전까지의 송나라는 용병제였다.] * '''보마법 (保馬法)''' 보갑법에서 동원된 보정(保丁)들에게 국가의 말을 빌려주어 농사 등에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 전쟁 때는 이것이 군마가 된다.[* 송나라의 고질적인 약점인 기마부대 양성을 위해서 추진된 보마법의 발상은 좋았다. 하지만 엄연히 농사에 쓰이는 말과 전쟁에서 쓰이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볼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 * '''농전 수리법''' 국가가 수리 시설의 유지, 보수 비용을 지출하여 지주가 이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함. * '''모역법(혹은 면역법(免役法))'''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던 노역을 화폐화하여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제도. 이 돈은 실업자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임금이 된다. 근대적인 세수 체계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소식조차도 폐지를 반대할 정도였다. * '''균수법'''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얻음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하고 물건 값을 조절하 며 안정화시킴. 왕안석의 주도 아래 진행된 신법은 그의 구상대로만 된다면 당시 북송의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대지주, 대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를 막아 세수를 증대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그 당시 [[북송]]에 꼭 필요한 개혁안이었다. 신종은 왕안석의 개혁안을 입안받고 난 뒤, 처음에는 열렬히 지지하였다. 따라서 왕안석은 이런 신종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을 따르던 관료들과 함께 전격적이고 빠르게 개혁안을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당장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두고보지 않았던 대지주, 대상인, 고리 대금 업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기에 더해 이들 계층에 해당되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도 신법을 반대하는 '구법파(구법당)’을 결성했다. 그 구법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광]]이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의 학문적 식견과 개인적 능력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이 살아있을 때에는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사마광이 집권 후 8개월만에 병사하면서 그들의 사후 신법파와 구법파의 대결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고 신법을 무기삼아 반대파 숙청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참고로 철종 초 재집권한 [[사마광]]이 신법의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긴하나, 그가 얼마 안가 사망해 8개월동안 진행한 것은 고작 신법을 혁파하는 정도였다. 더해서 신•구법당파의 대립은 왕안석, 여혜경, 한강, 증포, 장돈 등 강남 출신 관료들과 기존의 화북 출신 관료들간의 갈등의 모습까지 띄게 되면서 진종, 인종 연간 급격히 발전한 강남 일대와 기존의 화북 일대 사이의 대결 양상까지 띄게 되었다.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 신종의 아버지 영종은 인종의 조카로서 부필, 문언박, 한기라는 대신들에 추천을 받아 양자가 되어 즉위하였는데 기존 승계 원칙상 황제가 되기 힘들었으나 앞선 대신들이 영종의 즉위를 적극 주장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아버지이자 선황인 영종은 매우 고마워 하였고 영종의 아들인 송신종도 이 고마움을 늘 간직했다. 앞서 아버지를 추대한 대신들은 신종 시기에 구법파로 구분되었는데 다른 구법파와는 다르게 이들이 명예를 잃지않도록 탄핵 대신 중요 지방관으로 자리를 옮겨주어 황제가 직접 명예를 지켜주었다. 이러한 고마움을 담은 보답은 자신의 아들인 송철종도 보여주는데 후일 신법파가 정권을 잡을때 몸소 이들을 보호해준다.]이 극심해지고 있던 신종 7년(1074년), 하북에서 큰 가뭄이 들자 구법파에서는 이 가뭄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이라고 주장하며 왕안석의 퇴진 운동을 벌였다[* 당시 왕안석은 구법당 사람들로부터 전한 무제 시대 균수법, 평준법, 염철법, 술의 전매제 등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 상홍양에 비유되어 비난받고 있었다.]. 더해서 원래부터 아들 신종의 개혁 정책을 반대해왔던 선인성렬황후까지 나서서 왕안석의 퇴진을 주장하자 결국 신종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왕안석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기에 이른다. 왕안석이 좌천되고 난 이후부터 지극히 권세와 개인적 영달을 구하기 위해 합류한 인사들이 많았던 신법당파는 구심점을 잃고 서서히 분열했다. 그러다가 왕안석이 다시 복귀했지만 이 무렵부터는 구법당 신료들의 공세뿐만 아니라 왕안석의 보복을 두려워한 여혜경 등 일부 신법당 사람들이 앞장서 왕안석을 다시 탄핵했다. 이미 2년 전, 동생 왕안국을 잃었고 얼마 전에는 과거 급제 후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아들 왕방마저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왕안석은 믿었던 친구, 측근들의 배신까지 겹치자[* 왕안석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가 신법당 내부에서도 공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어느 누구도 꺾지 못한 그의 외고집과 실패한 정책임에도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낙향 후 은둔생활을 선택했다. 이후 왕안석은 금릉에서 자신이 주도한 신법들이 신종 사후 선인태후와 사마광 등 구법당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쓸쓸히 사망했다. 왕안석 실각 이후에도 조정 내에서는 여혜경, 한강 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신법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신종이 1085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1083년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한 데 대한 울분으로 사망했다.] 어린 철종이 즉위하면서 신종의 모후 선인태후 고씨와 새로 재상이 된 사마광에 의해 신법은 완전 폐기조치됐다. 신종은 죽은 뒤 영유릉에 안장되었고, 신종의 뒤는 불과 9세 밖에 되지 않은 장남 [[송철종|연안군왕 조후]]가 이었다. 이때 신종은 병석에 있었기에 대신들이 먼저 후계건저회의를 건의했고 신종과 선인성렬황후의 허락을 얻었다. 이후 선인성렬황후와 대신들의 회의를 거쳐 신종의 아들 연안군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뒤, 얼마안가 신종이 죽자 제위를 이었다. 철종의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맡았고 사마광이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왕안석과 사마광 모두 그 다음해(1086년) 잇달아 죽고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 사이의 당쟁은 격화되었다. 연경을 회복하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송 휘종 시기 환관 [[동관(북송)|동관]]이 연경을 공략하나 요군에 연전연패하자, 금에 원군을 요청한다. 이후 연경을 되찾자, 동관은 요, 금에 나라 망신을 다 시켰음에도, 광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신종 재위 기간 동안이던 1078년에 송나라와 [[고려]]는 84년만에 재수교했는데, 이때 고려의 국왕은 [[고려 문종|문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