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종(송) (문단 편집) === 서하 === 송 신종은 요와 서하가 북송을 노리는 상황을 극복하려고 했다. 당시 요나라는 강대하여 힘든 상황이었다. [[경력의 화의]] 이후에도 북송과 서하는 소규모 분쟁이 있었는데, 먼저 1066년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고 한기[* 남송 권신 한탁주의 증조부이다.]는 더 나아가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에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하였던 것과 두 번째로는 [[충악]][*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인해 청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충가군의 일원. 충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고 종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이 1067년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뒤 조정의 허가도 없이 서하의 수주를 공격하여 탈취하자, 이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하여 북송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이 그것이다. 이에 송 조정은 수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고 송 신종도 이에 동의했으나, [[곽규]]의 반대로[*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기도 했다.] 무산된다. 1068년에는 [[왕소(북송)|왕소]]가 '''평융책'''[*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주와 황주 이 2개의 주를 탈취해야 하고, 이 2개의 주를 점령해야 [[서하]]를 양면에서 포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3편을 올려 여러 소국으로 분열된 티베트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왕안석과 신종은 이에 적극 찬성하였고, 왕소는 1071년부터 1073년까지 [[왕안석]]의 지지 하에 유용가가 이끄는 토번 부족을 귀순시킨 뒤 토번군을 무찌르고 하황 일대[* 오늘날 칭하이 성 일대. [[황하]]와 황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이 폐단이 많자, 왕소도 실각하게 되고 왕소는 1081년 사망한다.] 1071년에는 충악이 나올에서 서하를 격파해 나올성을 수축하였고, 송은 수주성과 나올성을 거점으로 횡산 일대에서 무녕성과 여러 산채를 지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서하에 의해 선제공격을 받고 순녕채, 무녕성 등지에서 전쟁을 벌이나 서하가 승리했고 북송 정권은 그것들을 서하에 빼앗겼다.[* 충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 서하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서하 혜종 이병상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한족 출신인 양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양태후는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수시로 북송의 국경을 약탈하였는데,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1076년에는 이병상의 나이가 만 15세가 되자 혜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양태후는 섭정을 거두고 막후에서 서하 혜종을 꼭두각시로 부렸다. 이후 1081년 서하의 황제 이병상이 태후 양씨와 양을매 등에게 감금되는 등 서하에 내분이 일어났다. 한족 출신의 장수 이청이 북송 간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가 비었다고 한 뒤 서하 혜종에게 황하 이남을 돌려주고 황하를 양국 경계로 삼아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며, 북송과 연합해 양태후를 퇴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알아챈 양태후가 측근들과 함께 궁중 정변을 일으켜 이청을 죽인 뒤, 서하 혜종을 흥경부에서 5리 밖에 떨어진 목책 안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장수들이 반기를 들고 양태후 일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토번 수령 우장화마가 송에 군사를 일으켜 태후를 징벌하면 서하 군민들이 호응할 거라는 밀서를 보냈다. 이를 틈탄 북송 정권이 본격적으로 서하를 침공했는데, [[이헌(북송)|이헌]][* 이헌은 난주를 수복했다.]과 충악[* 충악은 10일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고준유]], [[유창조]], [[왕중정]] 등을 필두로 진군하여 처음에는 제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각 장수들 간에 단합이 되지 않았고, 보급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군대는 다 영주로 집결하였으나, 난주를 수복한 이헌의 군대만이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휘관 중 하나인 이헌이 환관이었다.][* 서하의 청야전술로 인해, 굶어죽는 북송군이 많았다.][* 당시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는데, 유창조의 군대가 용맹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준유는 이를 시기하였고 공성병기가 부족한데도 계속 싸우라고 독촉하였으며 서하군은 이를 틈타 황하의 제방을 무너트려 북송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대패하였다.([[오로벌하]]) 충악의 황산 점령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아들 충박을 보내 그의 계책을 상주시켰다. 송 신종은 충박(種朴)을 불러 상황을 묻고 충박을 각문지후(閣門知侯)로 승진시켰다. 조정은 황산에 가서 성을 쌓으려고 [[서희(북송)|서희]](徐熙)와 이순(李舜)으로 하여금 이를 지원하게 하나, 충악은 성을 쌓는 걸 은주, 유주, 그 다음에는 하주 이 세 곳으로 한 뒤 염주성을 쌓아야 서하의 소굴까지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송과 서하의 접경 지역에 연이어 3개의 성을 건설해야 하옵니다. 3개 성의 건설이 완료되면 변경 지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다음 서하의 수도인 흥주와 영주를 공격해야 하옵니다. 그 이후에도 서하를 정벌하려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여러 개의 진로로 나누어 공격하는 대신 한 곳에서 진격하기로 하였다. 서희와 [[심괄]]을 필두로 하여 영락성을 수축하고자 했으나 [[충악]]은 이에 반대했다.[* 영락성은 오직 산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데다가 수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락성에서는 반드시 패한다. 패하면 죽는 것이고 명령에 거절해도 죽는다. 지금 명령에 거역하여 죽는 것이, 군대가 패망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서희(북송)|서희]]는 이를 무시하고 그의 주도 하에 영락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하군의 공격을 받아 북송군이 패하고 서희는 난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영락성 전투]])[* 여기서 이헌의 군대는 서하의 군대에 가로막혔고, 심괄은 서하의 원군에 가로막혀 수덕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충악은 이 때 서하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영락성을 관망하였고, 얼마 뒤 병사하고 말았다.][* 서하군이 영락성의 수원을 끊자 영락성 내 북송군은 말똥을 갈아 즙을 마실 정도로 열악해졌다.] 송 신종은 서하가 여전히 꺾기 어렵다는 상대인 걸 깨닫고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고 만다. 그러나 서하도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백성들의 생업이 어려워지고 경제도 파탄에 이른다. 1085년 양을매가 죽자 양태후는 양을매의 아들 양을포를 재상으로 임명한 뒤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민심 수습을 위해 혜종 이병상을 복위시켰지만 동년 10월 병으로 사망했다. 송 신종은 서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