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토 (문단 편집) === 탄압과 획일화 === [[메이지 시대]]에 [[일본 제국|일본]]이 [[국민국가]]로 발전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그리하였듯이[* [[프랑스의 지방 언어 문제|프랑스의 방언 탄압]]이 그 예] 폭력적인 표준화와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비주류 신토에 대한 탄압도 그 일환으로써 이루어졌다. 자연적이지 않은 인위적이고 정책적인 정부 차원의 국가신토 장려는 '신사합사 정책'이라고 부르는 강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국가신토]]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 신사들은 강제로 통합, 폐쇄시켜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전역에서 [[신사(신토)|신사]] 7만여 곳이 폐쇄당한다.''' 신주가 폐쇄를 거부할 경우, [[일본 제국 경찰|경찰력]]을 동원해 신주를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주민들의 신앙을 받아온 오래된 신사 같은 경우는, 폐쇄에 반발해 주민들이 산이나 숲 깊숙한 곳에 임시 사당을 짓고 비밀리에 참배하는 형태로 반발했다. 일본에서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을 가다가 뜬금없이 황폐화된 작은 사당이 튀어나온다면 바로 이런 경우. 단순히 폐지할 수 없는 큰 신사들은 강제로 신을 바꾸거나 신의 족보를 바꾸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에비스]]의 경우 정확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신인데, 이 신을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족보]]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결국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가장 먼저 나았으나 불구라서 흘려보냈다는 섬인 [[히루코]]와 동일시해버렸다. 전국 에비스 신앙의 총본산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니시노미야신사의 경우 이 때문에 지금도 갈등을 빚고 있다. 그 외에 그냥 존재했던 토착신들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짜맞추다보니 본래 동네 사람들이 믿던 신들이 자기들은 처음 들어보는 신으로 바뀌어버리는 황당한 사태가 계속 일어났다. 백년 가까운 일본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면서 그냥 익숙해져 자리잡은 경우가 더 많지만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신불분리를 일석일조로 하다보니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신토와 [[불교]]의 중간자적 역할을 하던 신들, 예를 들면 우두천왕, [[변재천]], 우가신 및 [[칠복신]]들이 신사에서 지워졌으며, 불교와 신토의 습합으로 생긴 수적신들, 특히 산악신앙과 불교과 결합해 만들어진 장왕권현(자오곤겐) 등 권현(곤겐)들에 대한 신앙이 한순간 금지되었다. 우두천왕을 모시던 [[교토시|교토]]의 [[야사카 신사]]는 본래 불교의 기원정사에서 유래한 기온샤였는데, 신불분리령에 따라 이름도 바뀌고, 모시는 신은 우두천왕에서 스사노오로 바뀌었다. [[문화대혁명|문화재 파괴도 심했는데]], 신체(神體)의 하나였던 신상(神像)은 [[불상]] 같은 불교식 잔재라고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각 신사나 사찰에서 소중히 보관한 것이 많긴 하지만 [[불상]]에 비하면 전해오는 신상은 수가 대단히 적고 이름을 잃어버린 것도 많다. 신사에 있던 [[불탑]] 같은 불교식 건축물, [[불상]]과 [[불경]] 등도 파괴대상이 되었다. 교토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키타노텐만구]], [[나라시|나라]]의 오미야신사, [[가마쿠라]]의 츠루가오카 하치만구 등에 있던 문화재들 상당수가 이 시기 훼손되었고 불상이나 불경의 경우 몰래 인근 사찰로 옮겨진 경우도 많았다. 시골에서 음지로 들어간 신사들은 국가신토가 몰락하면서 다시 양지로 나오기도 했고, 사찰과 연계된 신사는 그 모습을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패전 이후 후유증으로, 혹은 젊은 세대가 잊어버려서 버려지는 신사도 많았다. 이때 숨겨진 신사들은 시골 청년들이 [[징병제/일본|징병]]을 피하는 대피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징병통지서]]에 불응하거나 직접 통지서를 갖고 징병대상자를 끌고 가려고 헌병이 마을에 나타나면 주민들이 대상자를 은폐된 신사에 숨겨두면서 징병을 피했다. 신사가 먹고 자는 숙소 역할을 해서 장기간 숨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농업]]의 특성상 젊은 일손은 마을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노동력이고 [[메이지 유신]] 직후 [[세율]] 책정을 위해 농지정리 사업을 벌이면서 농가가 가진 농지를 뺏거나 과한 세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정부|중앙정부]]에 내심 반발하는 농촌이 많았다.] 신사합사 정책은 [[일본의 항복|일제 패망]] 이전에 지식인들이 성토하여 폐지되긴 했다. '지역전통을 단절시키고 지방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 그 정도로 큰 반감을 샀던 정책이다. 하지만 합사만 중단했을 뿐 이미 훼손이 저질러진 곳들을 복권하지는 않았다. 복권은 전후 [[신도지령|국가신토 해체]] 후에나 이뤄졌다. 이런 맥락에서 전후 복권된 신사의 신도들 중에는, [[신사본청]]과 [[이세 신궁]] 등으로 대표되는 주류 신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전몰자나 위인을 모시는 신사에 대해서 '''사람을 신으로 모신 연혁도 기껏 백 년 좀 넘는 신사와는 역사와 격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을 신으로 모신 신사' 자체가 격이 낮게 여겨지는 건 아니다. 실존인물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나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모신 일본 각지의 덴만구나 [[도쿄]]의 [[간다묘진]]은 매우 격이 높은 신사로 여겨진다. 덴만구 자체도 사람을 신으로 모셨다고는 하지만 그 유래가 거의 천 년을 넘어가는 유서 깊은 곳도 상당히 많다. 간다묘진도 [[730년]]에 처음 지었다는 전승과 더불어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합사하게 된 것이 [[14세기]] [[가마쿠라 시대]] 말기의 일로, 이들에 비하면 [[야스쿠니 신사]] 등 근대 신사들은 정말 핏덩어리 축에도 못 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