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한청년당 (문단 편집) == 상세 == 당의 강령은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 등 세 가지였다. 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이 부분에 대한 배경은 1918년 11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 상해에 와서 '민족 자결주의'를 강연하는데, 마침 그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찰스 크레인을 찾아가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개인 면담을 나눈다. 그리고 여운형은 '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조선독립의 희망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등, 장덕수를 국내로, 이광수를 일본으로 파견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며, 1918년 12월에 부산에 파견된 장덕수는 백산상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일본 도쿄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인사들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 이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우사 [[김규식]]은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후 임시의정원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겸 주(駐) 파리한국통신국 대표위원으로 임명되고 신임장을 발송받았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 외교대표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김규식이 파리 시내 '샤토당'가 38호에 설치된 '강화회의 한국민대표부'는 이후 대한민국 주파리위원부통신국(Bureau de Information Coréenne, '파리한국통신부', '파리위원부', '파리통신부' '파리주재 한국위원부' 등으로 불리움)로 바뀌어 파리강화회의 이후에도 재 유럽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역할을 했다. ] 신한청년당의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 운동가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