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해철 (문단 편집) === 서강대 중퇴 === 수포자 출신으로서 학력고사 '''수학 0점'''에 타 과목 최상위권이라는 괴랄한 성적으로[* 지금이야 이런 성적으로는 아예 수학을 배제하는 홍익대 자전같은 극소수의 전형을 제외하면 모든 과목에서 최소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지방대조차도 못 가지만 신해철 시기에는 수학이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 난이도였고 수학을 아예 망쳐도 다른 과목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내면 나름 인서울은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학은 기본만 받쳐줄 공부만 하고 다른 과목에 올인해 인서울을 노리던 수험생들도 많았다. 신해철은 아예 0점이었기 때문에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대학에 합격한 신해철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중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떠드는 것처럼 명문학교 지향적인 현실의 작태를 비판하는 것 따위는 절대 아니고, 자기가 게으르고 학점이 안 돼서 퇴학 되기 전에 때려치고 나오는 '''명예'''로운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학사경고]]를 1번만 더 받으면 퇴학이었다고 하며 이후에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주려고 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말하길, "내 주변에도 12학기까지 학점이 1점을 넘지 못한 학생은 신해철이 유일했다"라고 했다. 본인 말로도 [[선동열]] 방어율급 학점이라고 했다. 원래 [[서강대학교]]가 공부를 매우 빡시게 시키는 대학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서강대가 빡센 것은 마찬가지지만, 1980~1990년대 당시엔 다른 대학들은 상대적으로 널널한 데 반해 서강대만 빡센 것으로 유명했다. 1980~1990년대는 명문대, 지방대 할 것 없이 데모로 인한 휴강,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취소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는 경제 성장기이자 호황이라 그렇게 놀면서 대학 생활을 해도 명문대 출신이면 대기업 몇 군데 씩은 복수 합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굳이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서강대생으로서의 학교 생활은 음악인인 그에게는 안 맞았다. 위쪽에 링크되어 있는 신해철이 당시 쓴 에세이 1편에는 학업과 음악활동을 하느라 너무 바빴고, 1시쯤 활동이 끝난 후에 컴퓨터를 사용한 음악 공부 내지는 연습을 하느라 하루에 4-5시간 밖에 못 자고 9시에 학교로 향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에세이만 보면, 음악 활동으로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해철이 서강대 밴드부에 안 들어간 건(사실은 '''못 들어갔다''') 위의 2.1 문단에서 설명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운동권]]에 약간 관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에 소수파였던 [[제헌의회그룹|CA]]와 관련이 있었고 [[교련]] 반대투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NLPDR]]들은 어중이 떠중이 모여있어서 [[최루탄]]이 터지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기 바빴는데, CA들은 소수정예로 전투력이 잘 다져진 투사들이어서 최루탄 연기를 헤치고 화염병과 짱돌로 응수하는 능수능란함이 있어서 더 괜찮아 보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