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해혁명 (문단 편집) === [[보로운동|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과 혁명의 전개 ===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보로운동]]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도 잇달았다. 특히 성선회를 찢어죽이자는 분위기는 [[쓰촨성]]에서 매우 강했는데[* 사실 쓰촨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保路運動)에 호의적이어서 조정에도 천한선의 민영화를 제안했으나 성선회의 거부와 강경진압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이풍은 혁명 후 붙잡혀 참수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E8%B5%B5%E5%B0%94%E4%B8%B0.jpg]] ] 기어이 9월 7일에는 보로운동 수뇌부가 체포되었고, 이에 일어난 쓰촨성에서 10만명이 넘는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성도혈안). 용명검 등이 만든 "수전보水转报"[* 강에 띄운 유동나무 목판. 성도의 젖줄 금강에 수백판이 떠내려가며 성도혈안을 쓰촨성 전역에 알렸다.]로 성도혈안 소식이 삽시간에 보로 동지군의 봉기로 이어졌고, 9월 말 사천 영현에서 첫 봉기가 성공하였다. 이어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성도([[청두]])가 마비되면서 사태는 쓰촨성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실제 쓰촨성이 신해혁명군에 합류한 것은 11월 20일경이다.]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한 청의 군대(후베이의 신군)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쓰촨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후베이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에는 군대가 비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우창의 신군부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이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가 가세했다. 혁명군은 총독 서징의 도주로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민주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중화민국]] 성립을 선언했다.[* 원래는 [[추석]]인 [[10월 16일]]에 봉기하려고 했는데 한커우 [[러시아 제국|러시아]] 조계에서 화약 폭발 사고로 계획이 모두 들통나 앞당긴 것이다. [[쌍십절]]의 계기다.] 이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 일컫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2gAmW1i-kDE)]}}}|| ||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 || 혁명파의 신정부 수립은 시의적절한 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혁명의 이념은 [[10월 22일]] 후난성과 [[섬서성]]을 시작으로 불과 1개월여 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 줬을 뿐이고 몸은 혁명 자금을 모으러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도시)|덴버]]에 있었다. 또 중국은 당시 각 성이 산발적으로 혁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많은 성들이 혁명파가 장악하기보다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던 입헌파가 주도하여 성들을 접수하였다. 우한 봉기 자체도 신군의 군벌들이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되는 등 기존세력과의 연대가 많았다. 그야말로 철도 국영화로 시작된 [[나비효과]]였다. 성선회는 [[독일 제국]] 화물선을 타고 혁명가들이 망명하던 [[일본 제국]] [[고베]]로 망명해 버렸으며 청조는 그를 삭탈관직하고 영원히 재기용하지 않겠다는 말로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개별 성들이 [[도미노]]처럼 탈퇴하자, 11월 말 경에는 청조의 남쪽 14개 성이 독립 상태가 되었다(순서대로 호북, 호남, 섬서, 강서, 산서[* 그 유명한 [[군벌]] [[옌시산]]의 동네. 이때 이미 [[옌시산]]은 산시성 도독으로 정권을 잡았고 이것이 그의 독립주의(산서성 먼로주의)의 시작이다.], 운남[*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별도로 중구 봉기를 일으켰다.], [[상하이]], 절강, 강소, 안휘, 광서[* [[루룽팅]]이 여기서 봉기해 부도독이 되었다.], 광동[* [[후한민]]과 [[천중밍]]이 주도했다.], 복건, 사천[* 11월 초까지 대부분 봉기한 성과 달리 군사적인 충돌로 독립이 제일 늦었다. 11월 27일.]) 각 성은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