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형민 (문단 편집) === [[포항 스틸러스]] === 서울오류초등학교, [[영서중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거쳐 [[홍익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박성화]] 감독이 이끌던 U-20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엔트리에도 들었지만 출전은 하지 못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 [[K리그/드래프트/2008년|2008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지명됐다. 당초 백업 자원으로 여겨졌으나 가끔 출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김기동(축구)|김기동]], [[황지수]] 등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22경기에 출전하여 3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신인상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이승렬]]에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 사실 팀 기여도로 따지면 교체로만 21경기를 뛴 이승렬보다 좋았지만, 당시 신형민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탓에 공격수였던 이승렬에게 밀리고 말았다. 2009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 20번'''을 달며 포항의 주축으로 활약하였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신형민이 가장 돋보였던 경기는 조별리그 6차전 [[가와사키 프론탈레]]와의 원정 경기였다. 당시 포항은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포항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당시 가와사키 소속의 공격수 [[정대세]]였다.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은 정대세의 마크맨으로 신형민을 세웠고, [[J리그]]에서 가장 힘이 좋고 저돌적인 공격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대세는 신형민의 터프한 대인 마크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이 경기에서 포항은 2-0 승리를 거뒀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알 이티하드]]와의 결승전에서도 풀타임을 뛰면서 팀의 ACL 우승을 이끌었다. 그렇게 팀의 ACL, 리그컵 더블에 기여했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표팀에도 부름받는 선수가 됐다. 2010 시즌을 앞두고 파리아스 감독이 팀을 떠났고, [[알 아흘리 SFC]]의 임대 제안을 받았으나 시즌 전 팀과 재계약을 채결했다. [[와우데마르 레무스]] 신임 감독 체제에서도 주전으로 나섰지만 팀은 최악의 시즌을 보냈고 신형민도 개인적으로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탈락하며 고베를 마셨다. 그래도 [[박창현(축구)|박창현]] 감독 대행 아래에서 부주장에 선임되며 팀을 잘 추르리는데 기여했다. 2011 시즌을 앞두고 부임한 [[황선홍]] 감독 아래서 역시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주장 [[김형일(축구)|김형일]]이 부상으로 결장할 땐 주장 완장을 달고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4월에는 연속 경기 득점을 터뜨리며 상승세를 타다가 4월 30일 강원과의 경기에서 [[서동현(축구선수)|서동현]]과의 경합 중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며 수술대에 올랐다. 하지만 2주 만에 마스크를 쓰고 복귀전을 치루는 투혼을 보여줬다. 2012 시즌을 앞두고 파리아스가 감독으로 있던 중국 [[광저우 푸리]]로 이적할 뻔 했으나 무산되었다. 김형일이 군입대하자 '''공식 주장'''에 선임됐다. 특히, 시즌 중반 공격진들이 연이어 PK에 실축하자 아예 공식 페널티키커로서 PK를 전담했다. 결국 2012년 8월 중순, 여름 이적 시장에서 UAE의 [[알 자지라 클럽]]으로 이적하였다. 당초 아시아 쿼터로 [[이용래]]를 낙점하고 영입 직전까지 갔던 알 자지라가 메디컬 테스트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이용래 대신 신형민을 급하게 영입한 것이다. 포항에서 K-리그 119경기 12득점 5도움, 리그컵 8경기 1도움, ACL 30경기 1득점 2도움, FA컵 11경기 1득점, 클럽월드컵 3경기 1도움 총 171경기 14득점 9도움을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