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흥무관학교 (문단 편집) === [[이회영]] 일가의 [[만주]] 망명, 경학사 설립 ===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으며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간도|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대고산(大孤山)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