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실레시아 (문단 편집) ===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지배 (1740 ~ 1918) === [[파일:prussian silesia.png]]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몰아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이하 프리드리히 대왕)는 실레시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다. 실레시아에서 [[프로이센군]]을 몰아내려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오히려 1742년 5월 코투지츠 전투(Battle of Chotusitz)에서 대패해 보헤미아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2년 6월 11일에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실레시아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넘겼다. 이후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 강국들에게 실레시아 통치를 승인받았다. 프로이센령이 된 실레시아에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행정조직이 설치되어 국왕 직속 행정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실레시아의 경제는 타격을 받았는데, 전쟁을 벌여가며 차지한 중요한 땅인 만큼 프리드리히 대왕은 사비까지 들여가며 실레시아의 재건에 힘썼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실레시아는 처음으로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았고 소수의 요새를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당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러시아에서 패배]]한 뒤 1813년 실레시아는 반 나폴레옹 봉기의 최선봉이 되었는데, 전쟁기간 브레슬라우로 피신해 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곳에서 '나의 국민에게(An mein Volk)'라는 조서를 발표해 독일인들의 무장 봉기를 호소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프로이센은 기존의 실레시아 지역에 [[작센 왕국]]에게서 빼앗은 라우지츠(Lausitz) 일부 지역을 묶어 [[슐레지엔 주]]를 설치했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통치 시기 실레시아의 역사는 대규모 [[산업화]]와 독일화로 요약된다. 이 지역의 주된 산업인 [[광업]]은 실레시아가 프로이센령이 된 직후인 18세기 중반부터 활발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처음 프로이센 정부는 각종 보호무역 특혜를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유무역체제로 전환했고 산업의 기계화를 진행하면서 많은 수공업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때 실레시아의 주 산업 중 하나는 리넨 섬유 산업이었는데,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수공업 위주로 섬유를 생산하던 실레시아의 방직공들은 당시 [[산업 혁명]]을 선도하던 [[영국]]의 방직공들에게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도 실레시아 방직산업의 기계화를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일자리와 전통을 잃게 된 많은 수공업자들이 이 상황에 불만을 가져 1844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파일:Eisenwalzwerk1.jpg]] ↑ [[https://en.wikipedia.org/wiki/Adolph_Menzel|아돌프 폰 멘젤]](Adolph Friedrich Erdmann von Menzel)의 '압연 공장(Eisenwalzwerk, Iron Rolling Mill)'. 1872년. 고지 슐레지엔 쾨니히스휘테(Königshütte)의 압연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철길을 만드는 모습을 담았다. 이런 성장통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1846년 브레슬라우와 고지 실레시아를 잇는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실레시아 곳곳에 철도가 깔리며 산업화를 촉진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기존의 주요 도시들 몇몇은 도태되었고 [[카토비체|카토비츠]], 쾨니히스휘테(현 폴란드 호주프), 보이텐(현 폴란드 비톰), 글라이비츠(현 폴란드 글리비체) 같은 석탄이 풍부한 고지 실레시아의 신흥 공업도시들이 등장했다. 19세기 중반 아직 [[독일 통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시기 슐레지엔 주는 [[루르]] 공업지대를 낀 [[라인란트]]에 이어 프로이센에서 두번째로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지나친 절대주의로 불만에 차 있던 실레시아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1848년 혁명 당시 동참하기도 했다. 1871년 독일 통일 후엔 고지 실레시아가 집중적으로 산업화되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 내에서 비교적 적었던 고지 실레시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파일:Schlesien 1905.png]] ↑ 1905년 슐레지엔 주. 초록색은 리그니츠 지역, 노란색은 브레슬라우 지역, 보라색은 오펠른 지역. 1919년 리그니츠 지역과 브레슬라우 지역을 묶어 저지 슐레지엔 주로 개편했고 오펠른 주는 고지 슐레지엔 주가 되었다. 한편, 근대적인 행정조직이 생기면서 훨씬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해졌고, 이런 행정력을 이용해 프로이센/독일은 이 지역에 남은 폴란드인 등 슬라브인들의 독일화를 진행했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인 교사를 줄이고 점진적으로 [[폴란드어]] 교육을 금지했다. 원래부터 독일인이 다수를 점하던 저지 실레시아의 폴란드인들은 빠르게 독일에 동화되어 갔지만 여전히 무시 못할 숫자가 자신들의 관습을 지켰다. 폴란드인이 다수였던 고지 실레시아에서는 독일화가 상대적으로 더디지만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1819년 67%를 점하던 폴란드인 비율이 1910년까지 53%로 줄었다. 고지 실레시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폴란드인의 숫자도 늘어갔지만 독일인은 그보다 훨씬 빠른속도로 늘었다. 고지 실레시아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독일화에 맞서 폴란드어 신문을 발간하거나 폴란드 구전을 전승하고 폴란드어 교육을 실시해 폴란드인의 문화를 지켜갔다. 어쨌든 이런 상황, 이런 민족 분포 때문에 [[슐레지엔 주]]는 행정 문서를 발행할 때 독일어와 폴란드어 둘 다 사용했다. 당시 슐레지엔 주를 포함한 실레시아 지역 전체의 민족에 따른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슐레지엔 주의 인구는 494만이었는데, 이 중 약 76%가 [[독일인]], 22%가 [[폴란드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체코인]] 등 기타 슬라브 민족이었다. 11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 중 105만 명은 고지 실레시아에 거주해서 고지 실레시아의 170만 인구 중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저지 실레시아에는 5만 정도만 거주해서 저지 실레시아 전체 인구 중 1.5% 정도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일부 남은 슐레지엔]]에는 68만 명이 거주했는데, 이 중 45%가 독일인, 33%가 폴란드인, 나머지는 체코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