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군리 (문단 편집) === 진나라 시기 === 진나라가 건국되고 진패선이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심군리는 부마도위가 되었고 영안정후(永安亭侯)로 책봉되었으며 오군 태수로 전출되었다. [[진천(남진)|진천]]이 즉위한 뒤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좌민상서(左民尙書)를 맡았지만 임명되지 않고 명위장군, 단양윤(丹陽尹)이 되었다. 562년에 다시 좌민상서로 제수되고 보병교위(步兵校尉)를 겸하였으며 이윽고 전군장군(前軍將軍)으로 전임되었다. 563년에 후안도가 강주(江州)에 진수하면서 심군리는 감남서주를 맡았다. 565년에는 인위장군(仁威將軍), 동양 태수로 전출되었다. 566년 아버지인 심순이 죽자, 심군리는 벼슬에서 물러났고 형주(荊州)로 가서 심순의 시신을 수습하기를 조정에 주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형주는 [[후량(남북조시대)|후량]]과 접한 곳이었기에 남진의 조정 대신들은 심군리를 보내는 것에 난색을 표했고 대신 심군리의 큰형인 심군엄(沈君嚴)을 형주로 보냈다. 이때 심군리는 신위장군(信威將軍),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기용되었다가 다시 지절(持節), 도독동형형2주제군사(都督東衡衡二州諸軍事), 인위장군(仁威將軍), 동형주 자사로 기용되었고 시흥(始興) 내사를 겸하였다. 그리고 다시 명위장군, 중서령(中書令)으로 기용되었는데, 심군리는 상중에 3번이나 출사를 명받았지만 모두 고사하였다. [[진욱]]이 즉위한 569년, 부친상을 끝내고 조정으로 복귀한 심군리는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제수되고 동궁의 사무를 행하다가 이부상서로 승진한다. 570년 심군리의 딸인 [[심무화]]가 황태자 [[진숙보]]의 비가 되면서 망채현후(望蔡縣侯)로 책봉되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572년에는 시중이 더해졌고, 573년에 상서우복야로 옮겼으며, 이부와 시중을 겸하였지만 병에 걸려서 그 해에 죽었다. 사후 심군리는 시중,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익좌장군(翊左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되었고 예전과 같이 시중을 받았으며, 또한 정헌(貞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심군리는 아들인 심준검(沈遵儉)이 일찍 죽어서 아우인 심군고(沈君高)의 아들인 심준례(沈遵禮)를 후사로 삼았다. 불교 [[천태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25년 출생]][[분류:573년 사망]][[분류:오흥 심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