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약 (문단 편집) == 생애 == [[삼조|삼조(三朝)]]를 섬긴 [[개국공신|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송(남조)|송(宋)]] 시기에 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동시대에 활약한 임방(任昉)과 당대의 문학에 두각을 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그의 시는 으뜸으로 꼽혔다. 그는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휘하로 있으면서 [[왕융|왕융(王融)]] 및 6명과 팔우(八友)로 일컬어졌으며 서쪽 저택의 [[범운|황문시랑(黃門侍郞) 범운(范雲)]],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 임방(任昉), [[사마|대사마(大司馬)]] [[무제(양)|소연(蕭衍)]]과 함께 교우를 맺었다. 이들은 서로 돈독하고 사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세상의 정세를 논의하며 모의했다. 그들은 이덕분에 소연에 의해 범운을 대사마(大司馬) 자의참군(咨議參軍) 겸 영녹사(領錄事)로 심약을 표기사마(驃騎司馬)로 임방을 기실참군(記室參軍)로 삼았다. 소연은 옛날부터 내심 [[선양|선양(禪讓)]]을 받을 뜻을 품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심약은 조금씩 이를 재촉했으나 소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다시 심약은 소연에게 다가가 또 다시 선양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 「지금은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에,순박한 풍속으로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사대부|사대부(士大夫)]]는 [[용|용(龍)]]을 타고 [[봉황|봉(鳳)]]에 붙어서,모두가 조그만 공적이라도 세우기를 바랍니다。지금 아이들과 목동도 제(齊)의 운명이 이미 무너진 것을 알고 있으니,명공(明公)께서는 그 운세를 이어야만 하고;천문(天文)과 참기(讖記) 또한 다시 확연합니다。천심(天心)을 어길 수도 없고,인정(人情)을 저버릴 수도 없습니다。진실로 운수를 가지고 있으면,비록 겸광(謙光)한다 하여도,역시 중지시킬 수 없습니다。」 >---- > 「今與古異,不可以淳風期物。士大夫攀龍附鳳者,皆望有尺寸之功。今童兒牧竪皆知齊祚已終,明公當承其運;天文讖記又復炳然。天心不可違,人情不可失。苟歷數所在,雖欲謙光,亦不可得已。」 이에 소연은 감탄하며 심약의 생각에 호응하며 자신 또한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며 답했다. 이에 심약은 다시 소연에게 말하였다. > 「공은 초기에 번(樊)、면(沔)에서 이때를 생각했어야 했는데;지금 왕의 대업이 이미 이루졌으니,무엇을 다시 생각하십니까!만약 조속히 대업(大業)을 결정하지 않아,어떤 이가 이의를 세운다면,곧 위덕(威德)을 해칩니다。또 사람은 쇠와 돌이 아니기 때문에,그때의 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어찌하여 건안(建安)의 봉작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까!만약 [[화제(남제)|천자(天子)]]가 도읍으로 돌아오고,[[공경|공경(公卿)]]이 자리를 찾게 된다면,군신(君臣) 몫이 정해질 것이므로,다시 다른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군주는 윗자리에서 밝히고,신하는 아래에서 충성할 것이니,어찌 다른 사람들 가운데 다시금 공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 「公初建牙樊、沔,此時應思;今王業已成,何所復思!若不早定大業,脫有一人立異,卽損威德。且人非金玉,時事難保,豈可以建安之封遺之子孫!若天子還都,公卿在位,則君臣分定,無復異心。君明於上,臣忠於下,豈復有人方更同公作賊!」 소연은 그렇다 여기고 심약을 돌려보낸 후 측근 범운을 불렀다. 소연은 범운도 심약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심약을 불러오게 했는데 소연은 곧바로 [[선양|선양(禪讓)]]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명이 떨어지자 심약은 곧 바로 품속의 조서를 꺼내고 선발과 배치도를 소연에게 바쳤으며 그것이 워낙 자세하고 섬세해서 소연은 더 이상 고칠 것이 없었다. 잠시후에 범운이 밖에서 궁전 문에 도착하였으나 들어갈 수 없자 수광합(壽光閤) 밖을 배외하고 심약을 불렀다. 심약이 마침내 궁전을 나오니 심약은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답했다. 후에 다시 범운과 심약을 부르고 그들의 재주에 감탄하며 말했다. >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어느덧 3년이 지났는데,공신(功臣)과 제장(諸將)의 실로 노고가 있으나,제왕의 대업을 이루는 이는,경(卿) 둘뿐이오!」 >---- > 「我起兵於今三年矣,功臣諸將實有其勞,然成帝業者,卿二人也!」 후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소연을 [[상국|상국(相國)]] 겸 총백규(總百揆) 겸 양주목(揚州牧) 겸 십군(十郡)에 책봉하고 양공(梁公)에 봉했다. 소연은 구석의 예를 갖추고 양에 문무백관을 설치하고 녹상서의 호칭을 버리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심약은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상서복야|우복야(右僕射)]]로 임명하고 범운을 [[시중|시중(侍中)]]으로 명했다. 소연이 황제에 오르자 상서산정랑(尙書刪定郞) 채법도(蔡法度) 중심으로 상서령(尙書令) 왕량(王亮), 시중(侍中) 왕영(王瑩), 상서복야(尙書僕射) 심약, 이부상서(吏部尙書) 범운, 및 5명에게 《양률(梁律)》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논의하게 했다. 후에 조정의 사무를 담당하던 범운이 세상을 떠나자 대신들은 당연히 심약이 그것을 이어 사무를 담당해야 된다 여겼는데 소연은 심약이 경솔하여 상서좌승(尙書左丞) 서면(徐勉) 보다 못하다 여기고 사무를 심약이 아닌 서면과 우위장군(右衛將軍) 주사(周捨)에게 맡겼다. 후에 심약의 어머니가 모친상을 달하자 심약은 그것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후에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봉해졌고 그뒤 상서령(尙書令)에 올랐다. 그 후에도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거치며 고관직에 책봉되었다. 어느날 심약의 꿈에서 [[소보융]]이 나타나 그의 혀를 잘랐는데 꿈에서 깬 심약은 이에 병에 걸렸다. 그럼에도 소연은 심약을 문책하며 병을 도지게 했고 심약은 결국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본래 조정에서는 문(文)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소연은 심약과 좋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에 은(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작으로는 《진서(晉書)》 110권[* 이세민 시기 다시 편찬되었다. 심약의 진서가 서진과 동진 시기의 비참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송서(宋書)》 100권,《제기(齊紀)》 20권,《고조기(高祖紀)》 14권,《이언(邇言)》 10권,《시례(諡例)》 10권,《송문장지(宋文章志)》 30권이 있고 문집 100권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