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영(배우)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때 활동 === 당시 유명 극단이었던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연기 초승달》과 《즐거운 인생》에서 데뷔했는데,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1929년]] [[11월 14일]]에서 16일에 걸쳐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간난이의 설움》이다. 당시 토월회는 심영의 연기에 대해 크게 호평하며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심영은 같은해 [[11월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아리랑 고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하게 데뷔를 하게 됐다. [[1930년]] [[1월 12일]], 심영은 남경의 거리 1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연극으로 심영은 극단의 간판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이 당시 종로 2가 YMCA 근처에서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4&cp_code=cp0902&index_id=cp09020007&content_id=cp090200070001&search_left_menu=1|'카페 멕시코'라는 카페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했다. 연기력에 대해선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는 등 꽤 호평을 받았지만[* [[드라마]] 동양극장 1회에서 "'''심영씨는 탑스타라 잘 알겠는데''', 차홍녀, 황철은 누구죠?"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당시 연극계에서 심영의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라이벌 [[황철]]이 부상하면서 인기가 많이 하락했다. [[1939년]], 심영이 창립한 극단 고협은 [[1940년]]부터 만주 위문공연 등으로 '''친일 연극활동'''[* 다만 이 행적은 1940년대에 들어, 친일 연극을 하지 않을 경우 연극 자체를 할 수 없었던 당대 상황도 감안을 해야할 것이다.]을 시작했다. 이후 고협은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창작 친일연극들을 제작하였는데, 《가두》, 《동백꽃 피는 마을》, 《빙화》, 《아름다운 고향》 등이 그것이다. 일제를 미화하고 황민화를 선전하며 전쟁참여를 독려한 작품들로 당시 여러 상을 수상하였으며 친일 연극 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의 간부를 맡기도 하였다. 연극활동과 함께 《복지만리》, 《그대와 나》, 《망루의 결사대》 등 여러 선전 영화들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중에 《망루의 결사대》는 비적과 일본군이 싸우는 활극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일제 기준에서 비적이라 함은 단순히 도적뿐만 아니라 항일무장세력도 포함했기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2009), 《친일인명사전 인명편;2 - ㅂ~ㅇ》, 서울:민족문제연구소, 417-420쪽. 2019년 7월 6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함.] 하지만, 2005년에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다수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를 선전한 배우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를 주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사유로 친일반민족행위 심의 과정에서 기각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서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14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