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영(배우) (문단 편집) === 말년 === [[친일인명사전]]에는 [[1966년]]부터 평양 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 [[7월 24일]]에 지병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귀순 공작원 [[김용규(1936)|김용규]]가 [[1978년]]에 출간한 책 '시효인간'에 따르면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18&num=14525|#]] 심영은 [[1971년]]에 [[숙청]]되어 [[평양]]에 소재한 삼신탄광 광부로 추방되어 고생하다가, 기존 사망일인 [[1971년]]보다 2년 후인 [[197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후회|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죄책감|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최후|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만 이 내용은 반공이 국시였던 [[1970년대]] 말에 당국의 감시를 받던 귀순자의 이름으로 출간된 반공수기의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김용규의 서술과 다르게 [[신상옥]], [[최은희(배우)|최은희]] 부부의 납북·탈북 수기에서는, 심영이 숙청되긴 했으나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강등]]되어 일선에서 [[해고|쫓겨나는 수준]]으로만 숙청되었다고 하며[* [[숙청]] 문서로 이동해 보면 알 수 있지만, 무조건 죽이거나 형벌만 보내는 것만이 숙청은 아니고 일선에서의 강등 또는 좌천되거나 직위해제당하는 수준도 숙청으로 포함한다. 이렇게 살아서 숙청당하는 경우는 자신이 쌓아 온 영예를 모두 삭제당하는 [[기록말살형]]까지 같이 받는 경우가 많으므로, 죽지만 않는다 뿐이지 살아도 산 게 아닌지라 조선시대의 [[팽형]]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쓸쓸하게 지내긴 했어도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그들 부부가 직접 심영을 만나지 않고,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완전히 사실로 볼 수만은 없다. 이들 부부의 수기에는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에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다만 이 수기에 언급된 심영의 경우에는 [[최은희(배우)|최은희]]가 북한에서 직접 만났었던 김연실, [[문예봉]],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모친)은 심영과 절친한 사이었고, 심영과 동시대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이다.[* 특히 문정복은 심영과 같은 극단에서 같이 연기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그 기록의 출처가 이들의 증언이라면 신빙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남한 출신 예술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작도니 문화예술단 간첩단 사건에 걸려 지방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조선대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리는 등 설령 숙청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복권된 것이 확실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