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온 (문단 편집) == 생애 ==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버지 심덕부는 [[위화도 회군|회군공신]]으로 [[고려]] 말 [[최무선]]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한양]]의 궁전과 [[종묘]] 건설 총책임자였다. [[정종(조선)|정종]] 대에 종3품 군사 직책인 보공장군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태종(조선)|태종]]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미지 때문에 사극에서도 주로 온건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행동파이자 야심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위인 [[충녕대군]]의 출세를 위해 세력을 포섭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 정황이 있다. 사위를 위해 거의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몸조심했던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나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과도 상당히 대비되는 행적을 보였다.[* 김한로와 정역은 오히려 문과 급제 동기인 태종이 작정하고 밀어줬다. 이들이 역임한 관직중엔 병조판서도 있는데 태종이 얼마나 군권에 민감했는지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신임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장인들처럼 몸을 사리지 않는 심온이 태종에게 거슬렸던 것으로 보이고, 장차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면 심온 집안이 어떤 영향력을 왕실에 발휘할 지 태종은 심히 우려한 듯 하다. 양녕대군이 14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장인인 김한로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반면 심온은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지 반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1418년 9월 사위인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태종(조선)|태종]]은 [[외척]]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했는데 마침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심온을 전송했다는 말을 듣고 심온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심온이 조선을 떠나있는 동안 심온의 동생을 강상인의 옥에 연루시켰고 심온 역시 연좌제로 연루시켰다. 결국 심온은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한양에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 강상인과의 연관성을 실토하고 하루 뒤 [[사약|사사]]되었다.[* 사실 심온은 관련이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심온이 떠나자마자 태종이 다시 강상인을 붙잡아 조사했고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해댔다. 그러고 나서 심온이 귀국하자마자 고문해댔는데 심온도 자기가 억울한 건 사실인지라 하루도 안 되는 사이 곤장을 3번 맞고 압슬형도 2번을 받으면서도 실토하지 않았지만 수사 책임자 역할을 맡은 [[류정현]]이 "당신쯤 되는 지위에 있는 분이 이런 고문을 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소? 실토하지 않고 배겨내겠습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심온은 결국 태종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게 이렇게 엮을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양위하고나서도 군국대사를 처리하고 있었고 심온의 동생 심정이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고위급 군 지휘관에 있었다. 심온의 아비 [[심덕부]]가 공신 중 하나인 것은 제외하고서도 심온의 다른 동생 심종이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딸 [[경선공주]]의 부마이자 [[무인정사]] 2등 공신이었다. 심온의 큰형 심인봉도 의흥삼군부 도총제로 고위급 지휘관에 있었으니 태종이 큰 문제라고 여기고도 남았을 정도였다.(형 심인봉은 그렇지 않을 것을 봐서 세종 즉위년에 도총제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심온 자신도 [[민무휼]]과 사돈지간을 맺었는데 둘 모두 끝이 좋지 않았던 것.] 이 때 태종의 뜻을 받들어 심온 숙청 작업을 맡았던 사람이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은]]이었다.[* 심온이 [[이조판서]] 시절 자파 인사 위주로 기용한다고 했으며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실권이 없다고 투덜거린다고 했다(다만, 심온은 국구가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로 가면서 영의정이 된 상태였다). 박은의 경우 당시 [[좌의정]]이었다.] 이 때문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다. 심온은 [[태종(조선)|태종]]이 승하한 후에도 복권되지 못하다가 외손자인 [[문종(조선)|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겨우 복권된다. [[세종(조선)|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건 알았지만 심온이 결백했다고 밝히고 복권시킬 경우 오히려 자기 아버지 태종이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서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부담과 왕실의 위엄 때문에 손을 못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을 진심으로 존경했을 뿐 아니라 대단한 [[효자]]였다. 아버지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장인을 복권할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는데, "간신 [[박은]]과 [[유정현]]이 충신 심온을 모함했다."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박은, 유정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심온을 복권시킬시 정치적 후폭풍이 불어닥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심온을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이 아직 살아있는 때라서 이들까지 갈아버려야 했는데 정치 보복은 세종의 정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효자/불효자 같은 개인적 성격을 따지지 않더라도 부왕이 한 일을 바로 뒤집는 것은 왕조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자체로 국왕의 권위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3~4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복권되는데 [[청나라]]의 중원 통일을 주도한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역시 [[순치제]]의 증손자인 [[건륭제]] 시기에나 복권될 정도. 좀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정조(조선)|정조]] 역시 생전에 [[사도세자]]의 복권을 꿈도 못 꾼 이유가 [[영조]]가 생전 정조를 사도세자의 일찍 죽은 형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늘 세자에게 자신은 책임이 없고 홍계희, 김상로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며 정조가 자신의 사후에도 함부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 없게끔 여러 견제책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즉위 당시 함부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함부로 논하지 말라고 했으며 사도세자 추숭의 상소를 올린 이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남인 [[채제공]]이 야당에서 제1여당으로 발돋움할 수단으로 당시 노론 세력에게 죄가 있다며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을 논하자 견원지간이였던 [[노론]]과 [[소론]]이 합세해 채제공을 역적으로 모는 등 한바탕 풍파가 일어나기도 했다.] 문종도 직접적으로 심온이 억울하다고 말한 게 아니고 내가 굳이 관직을 주려는 게 아니라 세종의 [[영릉(세종)|영릉]] 비문에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의 이름도 올라야 하는데 1번 새기면 고치지도 못하니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면서 운을 띄웠다. 물론 이 때쯤 되면 왕이 외할아버지 복권한다는데 반대할 신하는 없어서 문제없이 처리되었다.[* 다만 사헌부에서는 선왕(세종)도 뒤집지 않던 일을 뒤집어서 되겠냐고 태클을 걸었으며 문종 또한 내가 결정한게 아니고 신하들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적당히 넘어간다.] 그나마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죽지 않고[* 어차피 [[역모]] 사건이 벌어져도 여자들은 사형을 당하지 않지만 아들들까지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온의 숙청이 외척 경계에 의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정말로 반역을 꿈꿨다면 아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기 때문. 여담으로 심온의 적자들은 장남인 심준은 어려서 귀양을 가지 않았다고 하며, 차남 [[심회]]와 삼남 심결은 1418년, 1419년 생이다.] 변방의 관노로 전락했거나 관로가 막혔다가 태종이 죽은 후 [[이직(조선)|이직]]과 [[황희(조선)|황희]]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세종의 명령으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심온의 딸들 또한 별 탈 없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변방의 [[노비]]로 있던 시기에도 물리적으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마저도 오해를 살까봐 대언(=승지)들을 불러서 "선왕께서 관노로 삼는 건 원치 않아 했는데 [[류정현]]이 강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거고 그 이후에도 논의가 있기는 했는데 선왕께서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못했던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 심온의 아들 심회는 복귀한 이후 영의정까지 오른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5019_002|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심온의 일족이 노비가 되었던 일을 거론하면서 "일단 천인으로 만들되 천인의 일은 시키지 말 것이며 뒷날 이를 고치도록 하라"라는 태종의 지시를 언급한다. 험한 대우를 받았다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예 그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다. --누가 감히 왕의 장모와 처제들을 험하게 대우할 수 있겠는가-- <[[용의 눈물]]>에서는 심온의 아내가 노비 신세가 되자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비싸 보이는 옷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관군이 이를 꾸짖으며 심온의 아내를 대우해주는 모습이 나온다.] [[성종(조선)|성종]] 대의 중신 [[노사신]]과 [[세조(조선)|세조]], 성종 대 <사시찬요>, <[[금양잡록]]>, <[[고사관수도]]> 등을 남긴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심온의 외손자이며 또다른 심온의 외손자인 박중선의 딸들은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부인, [[중종(조선)|중종]]비 [[장경왕후]]의 생모이다. 이 때 [[역적]]의 딸이라 하며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종(조선)|세종]]의 항의와 아들을 이미 3명이나 두었다 하여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태종(조선)|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청송 심씨]] 가문의 숙청이 종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소헌왕후를 폐위하면 외척을 제거한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에 폐하지 않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이 [[박은]]을 흘겨보며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투기도 모르고 후덕한 며느리를 내가 왜 폐하겠는가? 내가 심온을 친 건 왕비를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척의 힘을 꺾어두려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끌끌~"이라는 장면을 넣어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아주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그 앞 장면에서 "이미 시집왔으니 그 아비의 죄에 연계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공비(소헌왕후)에게 밥을 먹으라 했고 염려하지 말라 했다."라는 말도 넣어서 이것이 결코 소헌왕후를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숙청의 목적이 왕비 집안 견제였는데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집안도 또 잡아야 했다. 그러면 또 폐비하고 또 숙청하고 악순환이 되니 왕비를 건드는 건 태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경우다.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새 왕비를 들여서 그 왕비가 적자를 낳게 되면 소헌왕후의 아들들의 정통성 문제가 꼬여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정통성 문제로 인해 이미 태종 본인이 일으킨 1, 2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바람이 있었다. 적장자 세습이라는 원칙을 어떻게든 확립하려 했던 태종으로서는 이런 모험을 또 할 수가 없었다. [[태종(조선)|태종]]이 죽은 이후 [[세종(조선)|세종]]은 심온의 죽음에 대해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심온 사건을 주도한 [[류정현]]을 따로 불러 좌의정으로 임명한 후 중대사마다 그의 의견을 참고했다.[* 함께 심온 사건을 주도한 [[박은]]은 태종이 죽기 하루 전 죽었는데 사후 세종에게 "아첨하는 신하" 라며 까였다. 아무래도 심온 사건 때 보여준 태도에 적잖이 기분 나빴던 모양.] [[소헌왕후]]는 그런 세종의 태도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이후에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 조선의 국가 정책이 숭유억불이기는 하지만 이는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인다는 것이지, 아예 불교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도 [[태조(조선)|태조]]가 중병에 걸렸을 때 승려들을 불러다 기도를 올린 적이 있고 세종도 말년에 불교에 기울었으며 [[세조(조선)|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불경]]을 간행했다. 이러니 왕실 여성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심온의 가족들은 이후 태종이 죽고 어느 정도 시간이 좀 나서야 복권이 될 수 있었지만 심온은 복권되지 못했고 이후 심온의 외손자인 [[문종(조선)|문종]]이 왕에 오르고 나서야 이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아들인 세종 입장에서는 부왕의 결정을 바로 뒤집는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자인 문종에게는 그런 부담이 훨씬 덜 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은 살아남았지만 세종 때는 연좌로 벼슬을 못하다가 문종 때 심회, 심결이 관직을 받고 세조에게 각별히 대우받아 심회는 영의정, 심결은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다. 심온의 장남 심준은 문종 즉위 전에 죽어 벼슬을 못 받았지만 그 아들 심미가 벼슬을 받았다. 그런데 심회는 [[성종(조선)|성종]] 때 [[폐비 윤씨]]의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여담으로 성종 ~ [[연산군]] 시기의 대신인 [[노사신]]은 그의 외손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