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왕 (문단 편집) == 배경 == 윤은숙 교수([[강원대학교]])가 저술한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고려 국왕이 심왕에 임명된 데에는 꽤나 복잡한 당대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13∼14세기 동북 만주 지역을 장악했던 [[동방 3왕가#s-2.3|옷치긴 왕가]]는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도의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경 왕씨 [[부마]]('''쿠르겐''')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했다.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태조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즈 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막내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 신생 제국의 국정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 그 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제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였다. 타가차르는 세조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리크부카]](阿里孛哥)를 툴루이 내전에서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제5대 카안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내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항상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울루스는 원 세조(쿠빌라이 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왕 제도도 옷치긴 울루스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왕위를 요동에 설치해 양자가 서로 충돌하여 옷치긴 울루스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훗날에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이 원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했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의 제25대 [[충렬왕]]은 장인이었던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 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카다안의 침입]]''').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요약하면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테무게 옷치긴|옷치긴 왕가]] 등 [[동방 3왕가]]들은 만주의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원나라]]의 [[대칸]]들은 [[원 간섭기]] 당시 [[고려]]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내세워 옷치긴 왕가 등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기 위해 명예직으로서 심왕 작위를 신설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에 대한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중앙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3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자리로 이용하기보다는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주로 이용하였다. 참고로 '''고려심왕'''의 경우, 심왕은 작위로서의 왕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작위가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를 [[동군연합]]이라 볼 수는 없으며, 참고로 제26대 [[충선왕]] 이후에는 고려 국왕과 심왕의 작위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따로 따로 주어졌으므로 이를 함께 겸한 것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