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재권 (문단 편집) == 생애 == 1946년 8월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에서 아버지 심병구(沈炳求, 1912. 6. 24 ~ 1996. 2. 21)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부용(李芙蓉, 1914. 10. 21 ~ 2006. 1. 31)[* 이봉선(李奉善)의 딸이다.]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 [[학생운동]]가 출신. [[배명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경제학부|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에 재학 중일 때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동기이자 친구 [[김근태]]와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주요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김문수]]가 젊은 시절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한 인물이다.[* 심재권이 같은 상과대 5년 선배였다.] 1970년 강의 시작 전 강의실에 들어가 후배들에게 연설하였는데, 이 때 심재권을 보고 매료된 신입생이 바로 김문수. 김문수의 회고로는 강의시간 직전에 강의실에 자신있게 들어와 "후배 여러분들은 머리 좋아 일류대학 들어와 입신양명하는 게 중요한가? 일류대학에 출세하러 왔는가?”라고 외치던 심재권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반해서 마치 어둠 속의 빛을 본 것 같았다고. 직후 김문수는 심재권을 따라 서울대 민주화운동 동아리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신 김문수가 학생운동보다 노동운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만든 계기는 [[김근태]]였다고 한다. 학생운동 동아리에 들어간 다음해 김문수에게 공활을 가자고 처음 말한 선배가 김근태였기 때문.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3학년에서 제적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는 유신 반대 투쟁을 하다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다. 1980년에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출옥 후 호주로 망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