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재원(축구선수)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97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한 바 있으며, 이 당시 대표팀은 [[브라질]],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했던 탓에 별다른 활약 없이 예선 탈락을 맛보았다. 이후 2000년 [[부산 아이콘스]]에서 데뷔했으며, 그 해 [[2000년 AFC 아시안컵|AFC 아시안컵]]과 [[2000 시드니 올림픽|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당대의 유망주로 각광받았다. 이후 2001년 부산의 K리그 컵대회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나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1년 1월 부임한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어 [[고종수]]와 더불어 초창기 히딩크호의 황태자로 불렸다. 당연히 주전수비수로 계속 출장했고 심지어 오른쪽 풀백으로도 시험해보는 등 높은 기대 속에 기회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당시 오대영과 더불어 '''히딩크가 까이는 이유 중 하나일 정도'''로 그렇게 믿음직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를 출장할 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건 사실인데 실수가 너무 잦았고 '''애초에 국대는 선수를 성장시키는 곳이 아니다.''' 다만 당시 히딩크는 [[홍명보]]를 중심으로 한 한국축구의 스리백을 포백으로 변화, 정착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즉, 한국은 포백 경험이 없었고 처음으로 시도하는 포백의 센터백으로서 심재원을 꾸준히 사용해본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심재원이 많이 짊어진 측면도 있고 당시 닥주전이던 홍명보와 히딩크가 힘싸움을 하는 와중에 홍명보만큼 안정감을 못 준 이유도 있다. 여하간 축협과 히딩크의 믿음 속에 국대로 꾸준히 출장했다. 그래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가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추진한 "유망주 유럽진출 프로젝트"에 선발되어서[* 이 프로젝트에 선발된 대표적인 선수로 당시 [[베르더 브레멘]]에 입단했던 [[이동국]]이 있다.] 당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분데스리가]]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1년 임대 후 이적이라는 조건으로 최종 계약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당시 원 소속팀인 부산은 적은 이적료와 연봉[* 임대료가 20만 달러(당시 약 2억 5000만 원), 연봉 15만 달러(당시 약 2억원)을 제시받았다.]으로 심재원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을 것이라며 이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안정환]]에 이어 또다시 주전 선수를 내주는 것에 [[김호곤]] 감독이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나, 당시 여론이 "유망주들은 무조건 해외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양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국대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심재원 관련 기사가 독일 [[빌트]]지 1면을 장식했다고... [[파일:attachment/Sim_Eintracht_Frankfurt.jpg]] 이런 사정 끝에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되어 '''한국 선수 중 최초로 유럽 무대에서 활동한 중앙 수비수'''가 되었다. 당시는 해외진출이라고 하면 J리그에나 가던 시절이고 유럽무대에서 뛰는 선수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큰 주목을 받았다. 이적 초반에는 계속 선발로 나와 풀타임을 소화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고, 대표팀에서도 [[거스 히딩크]]의 신임을 받으면서 계속 선발되었다.[* 여담으로 대표팀 차출 문제로 소속팀인 프랑크푸르트와 축구협회 간에 대립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는 그 당시 유럽에서 뛰고 있던 다른 선수들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 및 컨디션 난조로 인해 소속팀에서 주전 자리를 잃었으며, 자연스럽게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에서도 점차 멀어졌다. 이후 대회 직전에 [[이민성]]이 부상을 입어 대체자로 시험해보기도 했었는데, 결국 예비엔트리에는 들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심재원의 부상과 컨디션 난조는 축협, 그리고 당시 감독인 히딩크의 책임도 무시하지 못한다. 유럽에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선수를 10시간 넘게 비행기 나게 만든 후에 바로 출전시킨 것이 문제는 되었을 수 있으나, 최근 손흥민, 황희찬 등 많은 선수들이 유럽에서 비행하여 국내로 온 이후 제 기량을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선수의 기량이 안 좋았던 것뿐이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 상황을 알 수 없기에 속단은 금물이며, 이와 별개로 부상이나 컨디션 문제가 있을 경우에 장시간 비행은 부상 부위를 덧나게 하는 것이 맞다. 이른 나이에 국가대표를 은퇴하는 선수들 중 상당수가 장시간 비행으로 부상 문제가 심화되는 것이 이유인 경우가 많기에 컨디션이 양호한 선수와 부상 선수를 비교하긴 어렵다. 여하간 심재원은 그 경기에서 치명적인 미스로 결승골을 내줬고, 연패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히딩크는 '멍청한 선수 때문에 졌다'는 촌철살인의 팩트를 날렸다.] 초창기 황태자 소리까지 들었던 걸 생각하면 나름 충격적인 결말...그리고 월드컵 이후로 후임 감독인 [[움베르투 코엘류]]호 1기 콜롬비아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소집되었으나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다시 국대로 선발되지 못하면서 조용히 잊혀진 선수가 되었다.~~근데 똑같이 황태자 소리 듣던 [[고종수]]도 결국 월드컵 못갔다.~~ 월드컵 이후 프랑크푸르트로의 완전 이적에 실패해 원소속팀인 부산으로 돌아왔으며,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상주 상무|광주 상무]]에서 군복무를 했다. 전역 이후 다시 부산으로 복귀해 활약하다가 2009년 [[김은중]],[[이상일(축구)|이상일]]과 함께 [[중국 슈퍼 리그]]의 [[창사 진더]]로 이적했으며, 2010년에 국내로 복귀해 [[강릉시청 축구단]] 소속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