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일조 (문단 편집) === 개신교에서 말하는 십일조 === 1. [[민수기]] 18장에 하느님이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십일조에 관하여 계시하는 부분을 시원으로 본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공동번역성경|공동번역]]) >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개역개정판|개역개정]]) >---- >구약 성경 [[민수기]] 18장 21절 간단히 요약하자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직분을 담당하는 지파이기에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였으므로[* 성경에는 기업이 없으므로 라고 나온다.][* 레위지파는 다른 11지파와 달리 하느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할 구별된 지파가 필요했기에 하느님이 세운 지파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성전의 업무는 하느님이 지정하신 규칙대로 시행되어야 하며 그 규칙을 어기면 사망 또는 형벌이 임하기에 전문성이 필요했었다. 따라서 성전 업무에 전문성을 위해 아예 기업(분깃)을 주지 않았다.]레위 지파에게 [[이스라엘]]의 나머지 11지파에서 10%씩 소득을 거두어 그들의 성무에 대한 보수를 준다는 내용으로, 달리 소득이 없는 성직자들의 생계비와 성막(성전) 유지보수비에 대한 것을 십일조로 준다는 이야기이다. 현대에서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성직자라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활하는 게 아니며 신자들에게 제공하는 '''교회의 여러 업무''' 역시 공짜가 아니다. 신자들이 모여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 저 위에서 나온 것과 같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국가와의 계약으로 본다면 세금으로 공무원들 월급을 주는 것과 헌금으로 교역자들의 월급을 주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2. [[신명기]]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하여야할 규례와 법도를 명령하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붙이시고 당신께서 계시는 곳으로 삼으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서 고르신 그 곳을 찾아 그리로 가야 한다.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와 양의 맏배를 그리로 가져다 바쳐야 한다. >그 곳이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먹으며 즐길 자리, '''너희와 너희 식구들이 손으로 일해 얻은 모든 것,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으로 주신 모든 것을 먹으며 즐길 자리다.'''(5~7절) >(중략) >그렇게 되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골라주신 곳으로 내가 명령한 모든 것,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고르고 골라 야훼께 바치는 서원제물을 가져다 바쳐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아들딸, 또 너희 남종과 여종, 또 너희처럼 유산으로 받은 몫이 따로 없이 너희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들도 함께 즐기게 하여라.'''(11~12절) >(중략) >그러나 십일조로 바친 밀과 술과 기름, 소와 양의 맏배, 서원하고 드리는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흔들어 바치는 예물은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먹을 수 없다. >이런 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고르신 곳에서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만 먹되 너희의 아들딸,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희 성 안에 사는 레위인과 함께 먹어라. '''너희 손으로 드린 이 모든 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만 즐길 수 있다.''' >'''너희는 삼가 그 땅에서 사는 동안 레위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17~19장) >---- >구약 성경 [[신명기]] 12장 中 ([[공동번역성서|공동번역성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2가지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해동안 수고한 일에 '''여호와 하느님이 복 주심을 즐거워하는 의식''' 중 하나라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에 하느님이 복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그 복을 즐거워하여 헌금을 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11지파(현대의 평신도) 마음가짐이다. 두번째로 첫번째 입장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에 대한 보수의 개념으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절에 보면 '살아가는 동안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라고 명령까지 한 것을 보면 십일조가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레위지파의 보수라는 개념으로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서양에서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과정에서 국가 규모의 강제사항 또는 '''조세'''로서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의미이며, 개인이 내고 싶은 만큼 내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있다. 십일조를 내는 신자는 전체의 30% 가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십일조를 내는 신도들은 자신의 모든 소득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느님께 믿음과 정성을 다해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일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십일조 안 낸다고 교회에서 파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되고, 십일조 가지고 시끄러운 교회 있으면 교회를 옮겨버려도 그만이지만, 십일조는 바치는 신도들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각 때문에 이와같은 태도와 시각에 반대를 한다. 또한 교회 입장에서 십일조가 줄어들면 수입이 확 줄어들기 때문에 십일조를 강조한다는 시각도 십일조는 바치는 신도들은 십일조를 오해함으로써 발생한 잘못된 시각으로 본다. 하지만, 십일조를 내지 않는 70%의 신도들은 기본적으로 십일조는 신자 개인의 자유일뿐이며, 교회라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이므로 교회 외부의 사람이 관여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4. [[예수]]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공동번역성경|공동번역]])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개역개정판|개역개정]]) >---- >[[마태오 복음서|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3장 23절 예수가 율법으로서 십일조는 바치면서 진정으로 지켜야 할 정의, 자비(사랑), 믿음은 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정의, 자비, 신의)'''도 실천하라고 했다. 모두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신약서'''다.[* [[누가복음]] 11장 42절에도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물론 엄밀히 따지만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구약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예수도 생애에 걸쳐 구약의 모든 절기와 규례를 지킨 것이고, 보통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신약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다. 이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그의 쟁점은 명령받은 대로 십일조의 현물을 바치기는 하지만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했던 모든 발언의 효력은 영원히 지속되는 반면에 왜 이 십일조 발언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에서의 예수의 발언은 율법에 엄연히 존재하는 본질(정의, 자비(사랑), 믿음)이 빠진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큰 계명인 신명기 6:4를 어긴다면 아무리 십일조를 많이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신약시대 십일조의 직접적 근거로 삼을 수는 있으며 율법의 본질인 정의, 자비(사랑), 믿음이 들어간 십일조라야 현금과 현물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에서 '''이것(십일조)도 행하고'''라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말대로라면 구약의 형식적 규례들을 무조건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십일조의 현물·현금의 형식적 규례도 존중되어야 할 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보다 완전히 하게 하려 옴이라 밝혔듯이, 이는 ‘이젠 복잡한 율법의 규칙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세간의 관념과 달리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기준의 허들을 훨씬 높인 것에 해당한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함은 단순히 예수의 공로에 힘입어 들어간다는 차원을 넘어서, 구원받은 이는 실제로 모든 유대인의 규례를 편집증적일 정도로 철저히 지킨 바리새인보다도 더욱 나은 행실을 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크리스찬은 예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노예가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 권리가 없으며, 사나 죽으나 오직 주의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소유한 모든 재산, 벌어들인 모든 수입도 주의 것이 되며, 시간도 인생도 돈도 방종하게 사용할 권리를 잃게 된다.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 십일조는 우스울 수준으로 자기 전재산을 팔아 헌금하는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예가 된다. 그러므로 본인의 신앙심에 따라 십의 이조, 삼조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굳지는 못하지만 초신자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하고 진정 교회에 삶을 헌신하고 싶다[* 헌금이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며 신자들을 양육하는 목회자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정당한 사례금과 복음을 전파하라 한 예수의 지상명령대로 선교를 위한 기금으로 활용된다면 신약성경에 묘사된 건강한 초대교회의 모양과 흡사한 셈이 된다.]면 십일조는 그런 ‘나의 모든 것은 주의 것이다’ 를 표현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훈련의 시작점으로 좋기 때문에 전통처럼 남겨둔 교회가 많은 것이다. 즉 신약시대에 있어서 구약의 율법은 시작점에 해당한다. 이런 부분을 교육하지 않고 단지 개인의 사욕을 위해 헌금을 강조하며 여기다가 30배, 60배, 100배로 흔들어 돌려주실거다, 안 내면 벌 받을 거다 운운하는 교회는 걸러야 겠지만, 그와 별개로 십일조는 강제로 거두는 규칙은 아니지만 그 개인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으며, 예수도 돈과 하느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가르친 바가 있을 정도로 돈이냐 하느님이냐의 선택은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마음의 중심이 있는 곳에 재물이 있다 하듯이 본인이 사랑하는 곳에 돈이 쏠리게 돼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본인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이 핵심이다. 바울이 말하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기 때문이다. 반면 모든 걸 다 바치고 자기 몸을 희생해 주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수혜자는 둘째치고 자신에겐 유익이 없을 것이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랑 없이도 돈도 바치고 의무감에 도리를 다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사랑이 있는데 그게 표현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약의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남에게 베풀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십일조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이돌 노래에서 흔히 불리는 남녀간의 사랑과는 다르다. 성경적 사랑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이라는 게 가르침이다.] 즉 이것을 고민한다는 건 이미 시작점부터가 틀린 것이다. 수 년 뒤면 세상살이와 호르몬의 영향으로 시들해진다는 남녀간의 사랑도 불타오를 땐 서로를 위하고 좋은 것을 사 주려 하며 모든 것을 내 주려고도 하는데, 하물며 위에서부터 내려받은 사랑은 어떠하겠는가? 교회에 오래 거하면서도 사랑 안에 자라가지 않고 돈에 계속 매여 있으면 신앙생활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실은 하느님의 것을 맡은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며,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복되며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지나갈 곳이고 내세는 영원할 것이며 내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는지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자체가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십일조가 이토록 큰 문제가 된 것은 한국 목사들이 감사와 사랑은 등한시 한채 금액만을 강조하여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한 몫 했다. 기복적인 메시지를 내세우며 더 크게 돌려받을 것이라는 투자적 가치관의 설교, 안 하면 벌로 불행이 닥칠 거라는 공포 마케팅을 하고, 헌금으로 배를 불리며 돈 낸 양으로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며 정작 신도들을 이끄는 덴 관심이 없는 이들 때문에 십일조 내라는 말 자체에 학을 떼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그런 마당에 교회밖의 세간에서 일단 성경적으로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은 맞다고 하니 딱 여기까지의 반쪽까지의 사실만 듣고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신약에서도 구약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고, 목회자와 과부를 돕는 장로들의 생계를 지원하라는 성경구절은 등장한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지어 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이는 복음 전파에 걸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지 본인이 헌금을 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교인들이 자원하여 힘을 다해 모아준 헌금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가치관이 제대로 선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힘들게 번 돈을 성경을 바르게 가리치지 않는 [[목사]]에게 바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크게 흠이 없는 곳을 찾았다면 그곳에 소속해서 형편과 마음이 허락하는 선에서 헌금을 내면 된다. 돈을 사랑하는 걸 경계하라는 가르침은 거듭 등장하고, 교회의 핵심이 결국 “하느님과 ~ 중 뭘 더 사랑하냐”의 연속인데 사람 사는데 돈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우상이 되기 아주 쉽다. 그런데 목사들 이미지 안 좋은 걸 다들 알기도 하고, “결국 돈 내라는 거잖아?” 하는 반응이 올 것도 알기 때문에 이 부분 설교를 할 때 마음을 편치 않아하는 사람들도 있다.~~정작 먹사들은 기똥찬 말빨과 양심의 가책 없이 헌금을 거침없이 요구하지만 이를 지양해야한다~~ 무조건적인 지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목사]]는 십일조 등의 헌금에 대하여 설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여 정확히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