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룡검 (문단 편집) == 이순신의 검이 아니다? == 그런데 [[2019년]] [[1월 7일]] 주간경향 1309호를 통해 국내 이순신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역사평론가 박종평이 놀라운 견해를 내놓았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6&art_id=201812311300171#csidxc19905da9036416a797ad847bb39b1d|'''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했던 쌍룡검이라는 이름의 검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박종평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의 문신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746|임헌회]]가 쓴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復淵·1688~?)의 묘갈명인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使李公墓碣銘)>에, 쌍룡검에 새겨져 있었다는 명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한시가 이복연의 시라는 기록과 그 내용이 있음을 제시했다. > "공(통제사 이복연)이 한 쌍의 장검을 만들고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는 글귀를 새겼다(公鑄得一雙長劒 刻以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之句). 대개 공은 평생 이 충무공을 우러르며 그리워했기에 그 마음을 이처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박종평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종경이 쌍룡검을 얻었다는 시점과 거의 멀지 않은 시점인 [[1819년]]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李浩彬, [[1777년]]∼?)이 저술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364|신정아주지]]>[* 아산의 다른 이름이 아주이다.]라는 글이 있다. 이 신정아주지에선 현존하는 [[현충사]] 소장 장검과 쌍장검(쌍룡검)을 각기 따로 설명하고 있는데, 쌍장검은 이순신의 칼이 아니라 이복연이 만든 칼임을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에게 한 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鳴)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또 하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핏빛이 산하를 물들이도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현충사 소장 장검에 대한 기록. > “'''이복연은 단석(端錫)의 아들로 통제사로서 한 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과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분은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고 했다.''' 모두 이 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 李復淵 端錫也 以統制使鑄一雙長劍 銘曰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蓋慕李忠武之意也]”- 쌍장검(쌍룡검)에 대한 기록. 아울러 원융검기보다 이전의 기록으로 충무공의 4대손 이홍의(李弘毅)가 간행했던 <[[https://hcs.cha.go.kr/html/HtmlPage.do?pg=/n_hcs/library/library0302.jsp&mn=HCS_03_03_02&num=0103|충무공가승]]>과 그로부터 약 90년 뒤인 [[1795년]]에 [[규장각]]에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모두 '''현충사 소장 장검만 언급하고 쌍룡검이라는 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박종평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쌍룡검이라는 검은 사실 이순신의 것이 아니라 그의 후임인 이복연이 이순신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했던 것이며 이를 후대에 이순신의 검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박종평에 따르면 이순신과 이복연 모두 아산 지역에 연고가 있고[* 이순신은 아산이 외가였고, 이복연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다.], 똑같이 이씨이며[* 다만 이복연은 [[전주 이씨]]다.]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전력이 있어서[* 이순신은 초대와 3대, 이복연은 99대] 더욱 착각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한 검이 아니라고 해서 [[조선시대]]의 도검 유물로서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종평의 견해대로 지금까지 이순신의 유물인 줄로 믿고 애타게 찾아다녔던 칼이 사실은 [[병조판서]] 심상규와 훈련대장 박종경의 오해에서 기인해 이순신의 유물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고 하면 매우 김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