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쑨촨팡 (문단 편집) === 말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말년의 쑨촨팡.jpg|width=100%]]}}} || || 말년의 쑨촨팡 || 1930년 [[중원대전]]에서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재기를 도모했으나 반장파가 진압당하면서 실패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불경 공부에 전념할 것을 통전하고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 은거했다. 1933년 [[열하사변]] 이후 일본 제국이 하북성에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쑨촨팡을 포섭하려 들자 국민정부도 이에 맞서기 위해 쑨촨팡을 회유하려 하였다. 일본은 옹손도장의 구호를 내걸고 1935년 6월 14일 베이핑 시내에 삐라를 뿌려 쑨촨팡을 옹립하여 장제스를 타도하자는 여론을 조성했다. 쑨촨팡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이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의 이름을 이용한 삐라는 일본인의 음모가 틀림없다. 나는 전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쑨촨팡은 복잡한 정세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곤 했는데 쑨촨팡에 복수하려는 여인이 쑨촨팡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는 [[장쭝창]]의 부하였던 산동군 전선 총지휘관 시공빈의 딸 [[스젠차오]]였다. 시공빈은 1925년 10월 3일 [[손봉전쟁]] 중 안휘독판에 임명되어 쑨촨팡과 싸우다 패하여 포로로 잡혔는데 쑨촨팡은 포로로 잡힌 시공빈을 참수하여 3일 간 효수하였다. 이에 스젠차오는 복수를 맹세하여 10년이나 쑨촨팡의 뒤를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쑨촨팡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려다 실패했고 나중에는 쑨촨팡의 차를 외워 쫓아 죽이려 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았다. 좌절한 스젠차오가 1935년 9월 17일, 거사림(居士林)이란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통곡하자 절의 주지스님이 쑨촨팡같은 사람도 불교에 귀의했으니 열심히 불공을 드리라고 조언하여 쑨촨팡이 거사림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1935년 11월 13일, 스젠차오는 향불을 피우며 염불을 외던 쑨촨팡에게 브라우닝 권총 3발을 쏘아 머리에 적중시켜 죽였다. 이 소식은 중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쑨촨팡은 자신이 죽인 사람의 딸 손에 그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죽을 때 부인이 27명이나 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유산을 놓고 아귀다툼이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