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쑹자오런 (문단 편집) == 생애 == [[후난성|호남성]] 출신으로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반청(反淸)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해 [[일본]] [[호세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곧 중퇴한다. 1904년 귀국해 창사에서 [[황싱]] 등과 화흥회를 조직해 [[청나라]] 타도를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05년, 쑨원의 흥중회와 결합해 중국동맹회를 세우고 기관지 <민보> 편집을 맡았으며 1910년 [[상하이]]에서 일간지 <민립보>를 발행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난징 임시정부에서 법제국 국장을 맡았다. [[쑨원]]과 함께 중국동맹회를 세워 혁명운동을 이끌었으며 [[신해혁명]]의 주역. 중화민국 수립 이후 1912년, 비밀결사에서 공개정당으로 전환한 동맹회를 기반으로 여러 민주정당을 합병하여 국민당[* 오늘날 국민당과는 관련없음.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기원은 쑨원이 일본에 망명했던 시기인 1914년 '중화혁명당'이 시초다. 쑹자오런 때의 국민당은 1912년~1913년 존속했는데, 이 정당은 [[위안스카이]]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당했다.]을 창설하고 [[황싱]], [[왕충후이]], [[우징롄]], [[쑨원]]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총통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주었을 때 중화민국 사상 첫 내각인 [[탕사오이]] 내각에서 농림총장을 맡았지만, 위안스카이의 반동적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탕사오이가 퇴임하자 7월 14일 교육총장 [[차이위안페이]], 사법총장 [[왕충후이]], 공상총장 대리 [[왕정팅]]과 함께 동반 사임하고 국민당을 창설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에서 쑨원에 의해 총리로 추천되었지만 쑹자오런 본인도 고사하고 위안스카이도 거부했다. 이후 국민당 이사장 대리로 국민당을 영도, 1913년 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차기 총리가 될 것이 유력시 되는 상황에서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르자,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과 내무비서 홍술조에게 암살을 사주해 1913년 3월 20일, 무사영이라는 자객을 시켜 [[상하이]] 역에서 베이징 역으로 가기 위해 [[천치메이]], [[랴오중카이]] 등 동지들의 배웅을 받던 쑹자오런을 저격하게 했다. 이틀 후 3월 22일 쑹자오런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31세. [[쑹자오런 암살 사건]] 참조.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쑹자오런 암살 사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5%AE%8B%E6%95%99%E4%BB%81%E8%A2%AB%E5%88%BA%E8%BA%AB%E4%BA%A1.jpg]] (1913년 3월 22일, 장례식 당시 사진. 관에 넣기 직전에 시신에 예복을 입히고 의자에 앉힌 다음 촬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