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쑹저위안 (문단 편집) === 항일의 맹장 ===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장쉐량]]이 열하로 퇴각해온 후 1932년 [[왕징웨이]] 등의 비난을 받아 하야를 통전하자 반발하여 장쉐량과 진퇴를 같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1933년 일본군이 [[열하사변]]을 일으켜 맹공을 퍼붓자 대도대를 조직, 희봉구에서 일본군에게 맹렬하게 항전하여 전국적인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일본군은 전 호남독군 장경요 등을 이용하여 쑹저위안을 회유했지만 쑹저위안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5월에 일본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옛 주군 [[펑위샹]]이 1933년 5월 26일 장자커우에서 차하얼민중항일동맹군을 결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려 하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북평분회에 의해 무장해제된 이후 8월에 차하얼 주석에 임명되었다. 1935년 6월 5일,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체포되는 [[장북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쑹저위안의 사과를 요구했고 이 때문에 6월 18일 주석에서 면직되어 차하얼성 민정청장 겸 29군 부군장인 [[친더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35년 6월 27일 체결된 [[진토 협정]]에 따라 차하얼을 떠나 베이핑으로 철수했다. 일본은 쑹저위안을 포섭하여 [[화북분리공작]]에 동참케 하려 했으나 쑹저위안은 거부하고 6월 29일, 일본의 사주로 일어난 백견무의 폭동을 단호히 진압했다. 이 덕분에 7월 17일 청천백일장을 수여받고 평진 위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이 일어나 [[지둥방공자치정부|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되자 하북-차하얼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립된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하북성 주석에 임명되어 하북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35년 [[12.9 운동]]이 일어났을 때 베이핑학생연합회는 쑹저위안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해 항일운동을 지지하고 합작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쑹저위안이 몹시 거슬렸는데 1936년 3월 베이핑의 일본 대사관 부무관 이소타니는 육상 데라우치 히사이치에게 쑹저위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쑹저위안은 오직 난징의 명에 따르고 있으며, 우리 쪽의 위령을 완전하게 행사할 수 없다. (...) 우리의 자치공작이 궤도를 회복하는 데는 쑹저위안을 압박하여 우리에게 복종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주둔군을 증강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톈진의 증병시기를 앞당겨, 반드시 4월 중에 실현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데라우치 육상은 방공과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신축조약을 위반하고 1936년 4월 17일 톈진에 주둔한 일본군을 6천명이나 증강하여 진황도에 상륙시켰다. 국민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일본은 막무가내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5월 29일 외교부 아주사국장 고종무를 베이핑에 파견해 쑹저위안, 친더춘과 회담하게 했는데 쑹저위안은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장성항전에서 활약하여 명성이 높았던 쑹저위안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북방국 연락국장 왕세영 등을 파견하여 쑹저위안의 29군 내부에 설득 공작을 펼쳤고 마오쩌둥은 1936년 8월 14일 쑹저위안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의 처형을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