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쑹쯔원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1941년 시점에서는 워싱턴에 체류하며 대미 외교에 힘썼다. 1941년 11월, 주미 중국대사 [[후스]]가 미국이 중국을 희생하여 일본과 화해하려한다고 보고하자 격분한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 해군장관 필란데어 녹스 등에게 친서를 보내 격렬히 항의하였다.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이 정식으로 연합국에 가입하게 되자 중국이 버마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이때 영국군이 중국군의 물자를 공공연하게 탈취하고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미국으로 파견되어 이에 대해 항의하였다. 또한 [[조지프 스틸웰]]이 중국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가 중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군사무관으로 재직하던 사실을 들어 중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이 우려는 정확히 맞아버렸다.(...) 1942년의 연합국 공동성명에 미국, 영국, 소련에 이어 중국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5억달러 어치의 차관을 추가적으로 도입했다. 1943년 1월, 쑹메이링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하였으며 1943년 5월의 트라이던트 회의 결과에 대해 장제스가 불만족스러워하자 미국을 방문, 루스벨트에게 랑군에 대한 영미의 작전이 실시되지 않고 버마 공격이 궁극적으로 중국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없다면 중국군은 버마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달하였다. 이 시기 쑹쯔원은 미국인들에게 쿠바 춤의 일종인 '룸바'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가 대미 외교와 재정분야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정부의 제일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쑹쯔원도 자신이 싫어했던 스틸웰과 허잉친을 제거하기 위해 [[천청]]가 결탁하여 정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1943년 9월 8일, 국민당 5기 11중전회에서 전후 1년 안에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구성된 헌정실시 협진회에서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지시로 협진회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여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등과 회담하였다. 이때 장제스에게 모든 중국의 경제기관은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열받은 장제스가 쑹쯔원에게 찻잔을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5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6월 30일, [[이오시프 스탈린]]과 교섭을 실시하였으나 7월 14일,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면서 회담이 중지되었다. 이에 주소 미국대사 해리먼과 긴밀히 회견하며 전후 질서에서 중국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시 귀국했다가 8월 7일, 외교부장 욍세걸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8월 14일,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1945년,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의 국공 화해 노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충칭을 방문하자 왕세걸, 헐리와 함께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였다. 또한 [[두위밍]]의 주도로 윈난성장 [[룽윈]]이 무력으로 해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가 정부에 백기투항할 것을 권하여 룽윈을 군사참의원장으로 충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