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쑹쯔원 (문단 편집) === 광둥성장 시절 === 사직이 비준된 후 쑹쯔원은 4월 상순, 미국 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와 면담하여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곳은 광둥 밖에 없다. 혁명은 항상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발언하며 광둥성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다만 스튜어트의 보고에 따르면, 쑹쯔원은 광둥성 정부주석직을 맡고 싶지 않아 했으나 장제스의 제안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중국건설은공회에서 보유한 주식을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1947년 9월 20일, 쑹쯔원을 광둥성 정부주석 겸 정부위원에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10월 3일 취임한 쑹쯔원은 1948년 1월 27일,자원위원회 위원장 웡원하오와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광둥성의 전력건설, 남령매광 개발, 광둥당업 건설, 강철창 건설 등 광둥성경제건설에 대해 발표했다. 1948년 5월, 웡원하오가 행정원장으로 지명되면서 광둥성 개발은 더욱 급진전되었다. 쑹쯔원은 만주와 대만에서 기술 인력 및 자본설비를 유치하고 수력발전소, 제당공장, 강철기계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전문가들을 대거 초빙하여 광둥성 정부에서 일하던 cc계 인사들을 제거하고 광둥성에서의 권력을 확실히 했다. 쑹쯔원은 긴급히 돈을 빌려 각 공장들을 가동시키기 위한 반년분의 원료를 구입하였고 이를 통해 발전소 가동을 재개하여 광저우의 전력 소비량은 크게 증가했다. 1948년 7월, 쑹쯔원은 공장을 신설하는 한편 생산량 감독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에 1948년 8월까지 광둥성의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광저우사직창은 전쟁 이전의 생산력을 회복했다. 톈진과 상하이의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가동률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괄목할 성과였다. 또한 제당공업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줄이고도 오히려 생산력을 크게 높였으며 무역법을 입법하여 원료구매 문제도 해결하였다. 이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사탕수수를 공장에 제공하면 공장들이 이를 설탕으로 가공하여 설탕으로 갚을 수 있게하는 법이었는데 이 법의 인기가 대단하여 농민들이 앞을 다투어 신청하여 사탕수수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사탕수수가 남아도는 상황으로 변할 정도였다. 또한 시멘트 공장, 맥주공장, 제지공장 등의 영업도 모두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중일전쟁 중 약탈해간 설비를 반환받는데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국공내전]]의 재개로 정국은 매우 불안하게 변하고 있었다. 쑹쯔원은 금원권 개혁안에 대해서 처음부터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1948년 12월, 기어이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광저우의 독찰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상하이 자본가들을 강경히 두들겨 팬 [[장징궈]]와는 달리 이 정책이 비현실적이라 여겼기 때문에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말부터 광둥의 공업을 대만으로 보내라는 압력이 가해졌지만 쑹쯔원은 공장 보호운동을 벌여 이를 대부분 광둥에 남겼다. 내전이 악화되자 쑹쯔원은 광둥성 주석직에 대한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1949년 1월 20일, [[장제스]]가 쑹쯔원의 사임을 비준했다. 1949년 1월 23일, 쑹쯔원은 광저우에서 고별 연설을 행하며 자신의 정치 생애는 끝났으나 광둥성에 자신의 건설의 실적이 많다고 자부하는 연설을 남기고 미국을 떠났다. 이후 정부는 난징을 버리고 광저우로 천도했으나 공산군의 위협으로 충칭으로 다시 천도했고 10월 14일, 광저우는 공산군에게 점령된다. 쑹쯔원이 남긴 공업 유산은 모두 중공이 접수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빠르게 재건되어 중공의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