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쓰촨성 (문단 편집) === [[청나라]] === 중원을 정복한 청은 이전 왕조인 명의 행정 구역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켜 쓰촨성이라는 행정 구역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 당시엔 [[오삼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으나 곧 탈환되었다. [[건륭제]] 통치 당시에는 준가르 제국 정복 과정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티베트]] 그리고 [[칭하이성]][* 당시에는 코코노르라는 [[몽골어]] 명칭으로 불렀다. 이 칭하이와 신장이 언어도 민족도 전혀 상관없었던 지역인 외몽골과 티베트를 이어 주는 루트였다.] 정복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청의 준가르 정복은 3대 째 이어져 [[강희제]]는 제일 먼저 [[외몽골]]을 점령하고 할하 부족들을 휘하에 편입시켰으며 할하의 세첸칸부나 투세투칸부 등 외할하 왕공족들이 반 독립상태로 청에 조공을 시작했다. 그리고 옹정제 때엔 코코노르에 진출을 시작해 이 지역을 칭하이라 칭하였으며 건륭제 때 신장과 티베트 정벌로 완전히 준가르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가경제]] 통치 당시에는 비밀 결사인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백련교도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었고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강남(중국)|강남]]의 태평천국에 호응해 쓰촨에서도 태평천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 또한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 비용으로 약 3천만 냥 이상의 은이 쓰촨 지역으로 유입되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인과 지주층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쳐 충칭, 청두 등의 도시가 개항되어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1년]] 우창 봉기로 인해 촉발된 [[신해혁명]] 발발 당시 강남의 여러 성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쓰촨 또한 독립을 선언해 중화민국에 가담했으며 중화민국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하는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터진 곳 역시 이 곳, 쓰촨성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