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쓰촨성 (문단 편집) === 고대 === 원래 이곳은 [[황하 문명]]의 발흥지인 [[황하]] 유역과는 진링 산맥, 다바 산맥 등의 험한 산맥 지형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인데다가 황하 문명을 세운 [[한족]]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주 거주민이었기에[* 물론 멀리 보자면 사천성 남부에 살던 [[크라다이어족|태국인들의 조상뻘 되는 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족]]과 같은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티베트버마어파]] 계열 민족이였다. 그러나 이건 현대에 [[언어학]]과 [[인류학]]이 발달하며 알려진 거지, 당시에는 그냥 이민족 취급받았다.] 황하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장강]]을 비롯한 4개의 강을 끼고 있는, 거대하고 비옥한 분지 지형으로 인해 높은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삼성퇴 청동기 유적으로 대표되는 황하 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이 쓰촨 분지 내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쓰촨 문명은 고대 [[촉나라]]로 이어진다. 또 쓰촨의 주목할 만한 나라에는 [[파(춘추전국시대)|파나라]]도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은 말한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 촉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청동상은 중원보다는 오히려 [[북아메리카]]에 존재하던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는 당시 [[중국]]이 거대한 [[밀림]] 지대였던 탓에 같은 환경에서 발원한 [[마야 문명]]과 [[수렴 진화|얼추 유사한 모습으로 발전한 거지]], 이걸 무슨 [[이하동서설]]같은 것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촉의 국력은 중원을 능가할 정도였고, 독창적 문명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총과 어부,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사만팔천 년 동안 진나라와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 [[이백]]의 노래가 과장되기는 했지만, 촉이 독자적인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파나라는 지금의 [[충칭]] 일대, 촉나라는 지금의 [[청두]] 일대에 해당한다. 이 두곳을 합쳐서 파촉이라고 부른다. [[주나라|주]]가 [[중원]]을 제패하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황하 문명으로 대표되는 한족 문화가 주변의 이민족 영역으로 퍼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쓰촨 또한 이 흐름을 피할 순 없었고, 진나라에게 밀리게 된다. 비록 중원의 중심이 아닌 이민족이 우글거리는 변방 이미지였지만 쓰촨 분지의 높은 경제력 그리고 침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으로 이 일대의 제후국들은 평화로우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자 천하 제패를 노리는 주변의 강대국들, 특히 [[관중]]의 [[진(영성)|진나라]]가 이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진은 험난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파나라와 촉나라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정복 자체에 크나큰 애를 먹었다. 특히 지형이 큰 문제였는데 [[검각]]은 지금도 사람 지나다니기 힘든 길이라는 악명이 자자할 정도이다. 그러나 [[혜문왕]] 시절 [[사마착]]의 정벌 의견을 받아들여 군을 보내고, 꾀를 써서 이 둘을 정복한 이후[* 이 때 촉왕이 잔도를 구축하는 아둔한 행동으로 사직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고사인 [[소탐대실]]이 나왔다.][* [[중일전쟁]] 기간 가장 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일본군마저도 너무 험준하여서 육상작전을 포기하고 항공 작전 위주로 할 수 밖에없었다.] [[진나라]]는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6국을 국력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파촉 일대를 정복하여 관중의 경제력에 파촉의 경제력이 합쳐진 시기였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쓰촨 문명 또한 [[중원]]의 [[한족]] 문화에 흡수되었다. 아무튼 파촉을 위시로 한 쓰촨 분지의 경제력은 관중과 더불어 [[진(영성)|시황제]]가 최초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기원전 256년]]에 촉군 태수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 이랑(李郞)의 주도로 만들어진 [[도강언]]이 완공되면서 파촉은 식량 생산의 중심지가 된다. 시황제 사후 진이 [[항우]]에 의해 멸망한 이후 파촉은 이 일대를 분봉 받은 [[한나라]] 왕, 즉 영주였던 [[한고제|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관중을 정복할 때 이 일대는 관중 정복을 위한 후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진하여 천하를 재통일하고 한을 세울 때까지 [[관중]]과 더불어 배후지로서 기능하였다. 이는 [[시안시|장안]]에 [[전한]]의 수도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이미 [[한나라]] 건국기부터 수백년간 꾸준히 개발된 덕분에 나중에 삼국시대에도 [[촉한]]이 비록 땅은 나머지 둘에 비해 한참 작지만 [[위나라]]에 비해서 질적[* 생산량, 인구밀도]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특히 옆동네 [[오(삼국시대)|오나라]] 늪지대에 비하면 많이 개발된 땅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익주 하나만 가지고도 오랫동안 위, 오와 대치구도가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