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쓰촨성 (문단 편집) === 한~삼국시대 ===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이 곳에 [[익주]] 자사부가 설치되었다. [[신나라]]가 무너지면서 [[공손술]]이 성(成)나라를 세워 후한의 최후의 적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 할거 시대가 펼쳐지면서 익주는 [[유장(삼국지)|유장]]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를 지배하던 [[유비]]가 유장을 축출하고 익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유비는 이 쓰촨성에 [[삼국지]] 팬들에게 익숙한 바로 그 나라, [[촉한]]을 세운다. 물론 그 시절 촉한의 강역과 지금의 쓰촨성 구역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산지에 흩어져 살던 소수민족을 논외로 하고 보면 이 시대에나 지금에나 사람이 많이 사는 주요지역은 동일하다. 쓰촨성의 [[성도]](省都)가 바로 [[촉빠|삼국지 팬들]]에게 성도(成都)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청두시]]다.[* 청두는 성도라는 이름이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래서 청두 근교에 [[제갈공명]]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촉나라에 대한 여론은 당대에도 지역 주민들에게 좋았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덕분에 이러한 유적들이 2000여년 가까이 잘 남아있는 것이다.[* 반면, [[조조]]의 묘는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신뢰성이 의심되며 [[손권]]의 묘는 아예 현재로서 찾을길이 없다.] [[한중 공방전]] 초반 [[장합]]과 격돌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 '한나라 장군 장비가 정예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괴인 장합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세우고 글을 새기노라.(漢將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張合於八蒙, 立馬勒銘)'라는 친필이 류징현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때 발견되어 지금까지 관광지가 되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제갈량]]은 현재까지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쓰촨인들이 실속을 중시하는 것과 제갈량 사랑은 무관하지 않다. 명재상이었던 제갈량은 [[도강언]]과 각종 수리시설을 보강하고 세워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또,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 촉의 비단)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인연을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 오늘날에도 쓰촨은 중국의 10대 철산지다.]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더하여 현대에도 촉한의 향수를 느끼려는 삼국지 팬들이 관광객으로 찾아오고 있을 정도니, 당연히 제갈량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촉한에 대한 인식이 나쁠 수가 없다. 그래서 쓰촨 사람들은 제갈량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무려 1800년간 제갈량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라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