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씨름 (문단 편집) === 현대 이전 === [[파일:Goguryeo-Gakjeochong-Ssireumdo-01.jpg]] [[고구려]] 시대의 고분 중 [[각저총]]의 씨름도 [[벽화]]에서 알 수 있듯, 그 역사가 유구한 놀이이자 스포츠다. 한국의 [[전통]] [[무술]]이라 할만한 것들 중에서도 특히 투기 중에서는 [[태껸]]과 함께 그나마 씨름 정도가 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수박(무술)|수박]]이나 [[격구]] 같은 무술이 성행했지만, 조선시대는 오랜 기간 전쟁이 없었고[* 왜란과 호란이 있긴 했지만 시대적 간격을 보면 한세대에 일어날까 말까 하는 빅이벤트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삼국시대나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허구헌날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보면 조선은 당대 생각보다 매우 평화로운 국가였다.] 고려 말의 혼란기와 [[왕자의 난]]에서 얻은 교훈, [[사병]] 혁파 등으로 말미암아 단체로 무술을 수련하는 것을 반역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어 전통 무술의 명맥이 거의 끊기게 된다. 그러나 씨름이나 택견은 둘 다 무술과 스포츠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조선]]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일제강점기]]까지 버텨냈다.[* 다만 향유계층과 지역이 한정되었던 태껸은 사실상 사멸 직전 단계까지 갔었다. 물론 태껸이란 명칭이 아닐 뿐 태껸과 유사한 발차기 놀이는 몇몇 명칭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각 지역마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씨름에 대한 기록은 꽤나 많이 남아서 고려 [[충숙왕]]은 씨름 매니아였다고 전해지며 아들 [[충혜왕]]은 아예 궁궐에서 씨름을 즐겼고 [[공민왕]]도 국가주관으로 대회를 열어 씨름 대회에서 우승한 씨름꾼에게 쌀을 상품으로 내걸었으며, 용사라고 칭하여 왕을 호위하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21세기 식으로 표현한다면 씨름 대회 우승자를 청와대 경호원으로 뽑았다는 얘기이다.] 조선시대에도 국가 주관으로 대회를 열어서 좋은 성적을 걷은 씨름 선수에게 상품을 주기도 했고, 무예연습종목에 씨름을 포함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나름대로 씨름을 긍정적으로 본 듯하다. 다만 명종대에 궁궐에서까지 씨름이 성행하던 도중에 경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살해하는 살인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자, 사헌부에서 일시적으로 씨름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는 반짝 단속정도에 그쳤는지 그냥 흐지부지 된 모양으로, [[이순신]] 장군도 씨름 대회를 열어서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씨름의 명맥은 꾸준히 이어져, 조선 후기에는 [[단오]]와 [[설날]]이면 지역별로 소규모 경기가 열렸다고 전해지며 우승상품은 [[황소]]였다고 한다. 이것이 현대에도 트로피가 황소 모양인 이유다. 때문에 전국 씨름판을 돌며 소를 타가는, 소위 전문 씨름꾼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가로 황소 한마리는 경차 한대 값이었다. 천만원이 가니 못가니 하는게 요즘 한우 성체 한마리 가격이니 이 시대에도 경차 한대값과 그다지 차이도 없다.] 문제는 이 씨름이 워낙에 인기가 높았던 탓에 구경꾼들이 결과를 놓고 도박을 벌이는 등 범죄와 연결되는 문제가 있어서 조정에서 단속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위의 경우와 같이 어디까지나 반짝 단속 정도 수준에 그쳤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인기를 이어가서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씨름이 현대 스포츠로써의 구색을 갖춘 것은 1927년 9월, 조선씨름협회의 창단 당해[* 대한씨름협회에서는 1927년 개최되었다고 말하나, 휘문고등학교는 1929년에 개최되었다고 말하는 등 서로간의 기록이 엇갈린다.] 휘문고등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 씨름 대회로 비록 체급을 나누는 등의 세세한 규칙을 정하지는 못하였으나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던 씨름의 룰을 통합해 현대 씨름의 형태를 규정했다는 의의를 가진 최초의 프로 씨름이었다. 그 이후로도 씨름은 꾸준히 행해졌으나 이미 [[3.1 운동]]에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던 일제는 새로운 집회의 불씨가 될지 모르는 씨름 경기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고, 일제의 광기가 극에 치달은 1940년대에 달해선 1941년의 제6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를 마지막으로 씨름 경기는 더 이상 열리지 못했으며, 이는 해방까지 쭉 이어진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6년, 조선씨름협회는 [[http://ssireum.sports.or.kr/gnb/index.php|대한씨름협회]]로 명칭을 개명한 뒤 이듬해 기존의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의 명칭 또한 '전국씨름선수권대회'로 바꾸어 다시금 씨름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1956년 열린 제12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부터 체급제를 도입함으로써 씨름은 전 국민이 열광하는 현대 스포츠로써 새롭게 도약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