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씨름 (문단 편집) === 현대의 씨름 === 해방 후에도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씨름이 프로화 되기 이전인 1950~60년대에는, 명절 때 지역마다 씨름 대회가 열리곤 했다고 한다. 당시 전국을 돌면서 소를 타가는 반(半)직업적인 선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창 인기가 있었을 때는 동네 단위로 씨름 대회도 있었다. 특히, 큰 동네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다 하면 힘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이 모두 출전했다. 상품으로 [[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고려 시대 때는 삼베가 상품이었고, 조선시대 때는 차등을 줘서 상품을 줬다고 한다.[* 다만 어떤 상품인지는 문헌에 없다.] 무조건 소를 준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상품 대신 상금을 주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라고 전해진다. [include(틀:영상 정렬, url=t8bg5fRN1XY)] [[대한뉴스]] 제1회 천하장사 씨름 대회 그러다 [[1983년]] [[4월 13일]]부터 [[4월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천하장사 씨름 대회를 계기로 씨름 중흥의 장이 열린다. 특히 1회 대회 천하장사인 [[이만기(체육인)|이만기]]라는 엄청난 스타가 씨름계의 제왕이 되면서[* 사실 프로 씨름 첫 대회가 열릴 때만 해도 천하장사 우승후보로 예상되던 선수는 그 직전까지 아마 씨름 대회 정상을 달리던 [[이준희]], [[홍현욱]] 등이었고, 그 전까지는 무명의 대학생 선수일 뿐이었던 이만기는, 자신의 체급이었던 제1회 한라장사 대회에서는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체급 구별 없이 치러진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만기는 제1회 백두장사를 차지한 우승후보 이준희를 준결승에서 꺾고, 그 여세를 몰아 첫 번째 천하장사까지 차지하며, 말 그대로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가 되었다.] 국민 스포츠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파일:/image/036/2006/09/19/021118000120060912627_26.jpg|width=100%]]|| 당시 민속 씨름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냐면 천하장사 결승전을 할 때는 길거리가 텅텅 비었고 '''심지어 [[KBS 뉴스 9|밤 9시 메인뉴스]]가 천하장사 결승전 중계방송에 밀리던 때가 있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 기수를 맡았고 이 대회 [[역도]] 남자 최중량급에서 금메달까지 땄던 이민우 선수가 얼마 안 지나 씨름으로 전향했을 정도였다.[[https://n.news.naver.com/sports/general/article/109/0000048626|#]][* 물론 이민우가 씨름으로 전향한 것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기는 했지만 세계수준과 격차가 너무 심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얻은 병역특례마저 취소되기도 했다. 이민우는 2006년 9월 9일 간경화로 사망했다.] 이만기가 국민 천하장사가 되어 1980년대를 호령하면서 폭발했던 국민적인 인기는 훗날 [[강호동]]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이만기 이후의 2세대 민속 씨름의 간판으로 활약한 199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강호동이 돌연 은퇴 선언 후 방송인으로 전업하고 기존의 씨름 플레이 스타일이 대중으로부터 흥미를 얻지 못한데다 [[1997년 외환 위기]]의 영향으로 씨름단이 다수 해체되면서 씨름의 인기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경기시간을 오전부터 잡아서 거의 하루종일 하는데다 [[서울특별시]]나 [[광역시]]보다는 각 지방의 [[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 단위 지역을 순회하며 대회를 열기 때문에 직관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래도 전국단위 씨름 대회가 열릴 때면 항상 지상파 [[KBS1]]을 통해 대대적으로 생중계되는 점이[* 다만 예선부터 다 보여주지는 않고 각 체급별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중계한다.]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만일 경기 시간을 구기종목처럼 저녁 시간으로 개선해준다면 직장인들과 학생들을 팬으로 끌어모을 수 있다. 여자 씨름의 경우 해방 전까지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해방 전후인 1940~50년대에 영남 일부지역에서 간헐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정식으로 여자 씨름 대회[* 본 대회는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여자 씨름에서 권위있는 대회 중 하나로 꼽힌다.]를 개최하면서 최초의 전국규모 대회가 되었고, 1991년부터 대통령배 대회가 개최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남북분단 이전부터 향유하던 문화이므로 북한에서도 하는데, 기념일이나 명절때마다 국가나 지방정부, 학교 주도로 경기가 열리곤 하며, 각종 체육대회 종목으로 지정되는 등 많이 장려된 종목이라고 한다. 특히 우승자에게는 황소 한 마리 등 푸짐한 상품을 내주면서[* 북한에도 농기계가 어느 정도는 보급되어 있지만 농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농지가 남한보다 훨씬 많고, 농기계에 들어가는 기름도 모자라다 보니 여전히 소가 중요한 농업생산 수단이다.][* 다만 황소를 주는 것은 요식행위에 가깝고 실질적으로는 부상으로 내거는 상품들을 가지고 오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물론 1990년대 중후반 당시에는 이것도 꽤나 귀중한 물건들이었고, 군대에 빠질 수 있다는 이점도 있어서 이걸로 보상은 된다고 한다. 특히 당시 북한의 경제가 한창 어려웠을 때도 씨름 장사에 대한 융숭한 부상은 유효했기에 구미가 안 당길 리가 없었다.] 큰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참가하는데에 있어서 나이와 직종제한은 일절 없다고 하며 쇠퇴의 길로 접어 결국 없어진 남한의 민속 씨름과는 다르게 여전히 인기가 많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도 씨름 선수나 전직 씨름 선수가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다만 남한의 씨름 대회와는 몇가지가 다르기는 한데 우선 남자의 경우에는 상의를 탈의한 채 출전하는 남한의 씨름 대회와는 다르게 상의를 입은 채로 경기에 출전하며 경기장도 모래판이 아닌 매트판에서 진행한다. 물론 기본적인 규칙은 비슷하다. 씨름 선수들은 대체로 체중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군대 신체검사에서 대부분 보충역 이하의 판정을 받는다. 과거에는 씨름 선수가 군대 면제 판정을 많이 받았으나 현재는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