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가디르 (문단 편집) === 번영과 지진 === [[파일:모로코 아가디르.jpg|width=700]] 아가디르 카스바 17세기 [[아흐마드 알 만수르]]의 사후 사드 조가 내분으로 쇠퇴하자 모로코는 다시 분열되었다. 남부 수스 지방에 세워진 타제르왈트 왕조는 내륙의 일리그가 수도였지만 대외 무역을 중시하였기에 아가디르를 그 외항으로 여겨 중시하였다. 비록 부두와 같은 항만 시설이 미비했지만 유럽 상인들이 왕래하여 설탕, 밀랍, 구리, 가죽 등을 수출하였고 무기와 직물 등의 제품들을 수입하였다. 1670년 타제르왈트 왕조는 모로코를 재통일하는 [[알라위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알라위 조는 프랑스 대신 영국, 네덜란드에 우호적이었기에 아가디르에도 해당 국가의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모로코 남부의 대표 항구이던 아가디르는 1731년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항구로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북쪽의 [[사피]]와 모가도르로 대체되었다. 1746년 술탄의 허가 하에 네덜란드 인들이 카스바 아래에 상관을 세우고 도시의 재건에 일조하였다. 당시 글귀 '신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중하라'가 지금도 성문에 남아있다. 하지만 1764년 모가도르를 개조하여 유럽식 항구도시 [[에사우이라]]로 재창조한 술탄 무함마드 3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수스 지방에 대한 징벌로 그 외항인 아가디르 대신 [[에사우이라]]를 모로코의 유일한 대외 교역항으로 지정하며 1767년에는 아가디르 주민들마저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1773년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1789년 유럽인 방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아가디르는 몇몇 가구만이 남은 유령 마을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한세기가 지난 1881년 술탄 하산 1세는 외세의 간섭이 있던 수스 지역의 개발을 위해 아가디르를 다시 개항하였다. 다만 3년 후 도시를 지난 프랑스인은 무역이 없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라 기록하였다. 1911년 2차 모로코 위기 당시에 [[독일 제국]]은 전함을 파견했는데, 이에 영국이 강력 반발하자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한 후 함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독일측의 명분 제공을 맡은 헤르만 빌베르크는 계산 오류로 전함이 도착하고 3일 후에야 아가디르에 당도하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913년 6월 15일 프랑스 군이 아가디르에 상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