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역사 (문단 편집) == 고대 말 == 아르메니아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를 신봉하는 등 이란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나, 이란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기 288년 왕위에 오른 [[티리다테스 3세]]는 로마 제국을 모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와 상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가 [[밀라노 칙령|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도 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1세|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392년이니 무려 8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자국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역사상, 아르메니아가 첫째, 조지아가 2번째, 그리고 에티오피아가 3번째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교회는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이후 이 나라 옆에 위치한 아라라트산(구약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산)이 위치했다는 점을 생각했는지 자신들을 노아의 직계 후손이라고 자칭하였다.[* 이 점 때문에 이스라엘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도 남자 이름으로 [[아라라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험난한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세기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나라에서도 전란이 끝이지 않았다. 결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3세]]와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 사이에 조약이 맺어지며 국토가 반동강나고 페르시아의 통제가 심해지며 멸망했다. 이후 몇 차례 아르메니아 본토나 소아시아 남부 지역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모두 단명했다. 대신 아르메니아 분할에 대응으로 아르메니아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405년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문자가 창안되고 기독교 문헌들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현대 아르메니아는 [[동유럽]]에 가까운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공인 이전 아르메니아는 종교([[조로아스터교]])와 문화, 습속, 인종 등 등 여러 면에서 이란과 유사했기 때문에[*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헬레니즘, 로마 문화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 유적들이 남아있다.],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지대라는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이란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이란의 지배세력이 파르티아계 아르사케스 왕조에서 페르시아계 사산 왕조로 교체되자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던 아르메니아 왕가는 사산 왕조와 적대하게 되었고, 기독교 국교화까지 시행됨으로써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아르메니아 문자가 창안된 이후로는 [[아람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 문헌들이 꾸준히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면서, 페르시아인과는 다른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사산 왕조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중부/동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와 친로마파 귀족들을 억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이란의 일부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대규모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봉기/아바라이르 전투) 전쟁 자체는 이란이 이겼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이 워낙 거셌으므로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어느정도 자치권과 기독교 신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 등 아르메니아계 장수들이 사산 왕조 내에서 활약하고 아르메니아계 후궁들이 샤한샤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사산 왕조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서서히 개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