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역사 (문단 편집) == 중세 == 7세기 이후 동로마가 소아시아를 상실한 이후부터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파급되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지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 본토의 정교회와의 갈등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보다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리엔트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더 가까웠던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결국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정교로 발전하게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키릴로스주의(합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십자군 전쟁기에 서방교회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잠시 동안은 아예 가톨릭으로 귀의한 적도 있었다. 이런 복잡한 교회사 때문에 아르메니아 정교의 변천은 역사의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고있다. 7~13세기 동안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諸國)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바스푸라칸 왕국, 아니 왕국, [[로리 왕국]] 등 독립국도 존재했다. 이 동안 아르메니아 본토를 떠난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 나갔고, 주류층에 편입된다. 심지어 아르메니아 출신의 황가를 두 차례씩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동로마가 결코 서방의 주장대로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따금씩 보이는 바르다스(B(V)ardas), 바르다네스(B(V)ardanes)라는 이름은[* 고위 군사 귀족이자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초기의 반란군 사령관이었던 [[바르다스 포카스]]·[[바르다스 스클리로스]], [[테오도라(9세기)|9세기 아모리아 왕조의 테오도라]]의 남자 형제인 [[바르다스]] 등이 잘 알려져 있고 이외에도 여럿 더 있다. 또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20년간의 혼란]] 중의 황제였던 [[필리피코스]]의 본명이 바르다네스였다.] 그리스어·라틴어나 성경을 통해 들어온 히브리어 이름이 아닌 아르메니아어에서 온 이름이다. 특히 바르다네스는 파르티아 군주의 이름으로 2번(1세, 2세)쓰였다는 점에서, 위에 나와 있듯이 원래 종족, 문화, 언어적으로는 아르메니아가 이란계 국가와 매우 밀접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7세기 동로마의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헤라클리우스]]와 그가 일궈낸 왕조가 아르메니아 출신. 이 왕조가 단절된 후인 9세기에 한번 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 1세]]가 등극하면서 아르메니아계 [[마케도니아 왕조]]가 들어선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아르메니아 본토에서도 바그라투니 왕조(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라고 부르기도 하며 수도는 현재 터키에 있는 [[아니]](4번 항목)였다.)가 등장하여 확고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인 아르메니아에 갖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는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바그라투니 왕조(또는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조)는 이웃 [[조지아]]의 왕실인 [[바그라티온 왕조]]로 이어졌으며, 이 가문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을 거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는 지진 및 여러 전쟁으로 버려져서 지금은 쓸쓸한 폐허로 남아있다.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 지대 킬리키아는 서기 965년 동로마 제국의 [[니케포루스 2세]]가 새로 재정복한 지역으로 강경 반이슬람 성향이었던 니키포루스 황제는 원래 이 지역의 무슬림 주민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고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아르메니아 왕국이 내분으로 휘청거리자, 동로마 제국이 일부 영토를 합병하되 그 대가로 바스푸라칸의 군주들에게 세바스테이아에서 유프라테스 강 북부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식민지로 내주었다. 또한 후임 황제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한 탓에 1070년경까지 척박한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아나톨리아 해안의 따뜻하고 기름진 땅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었다. 그러나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소아시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히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남은 영토 역시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계속 공격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계속 [[킬리키아]] 지역으로 이주 합류하였고 이들은 십자군이 오기 전까지 여러 소국들을 세워 자신들끼리 끊임없이 다투었다. 이런 소국들 중 단 하나만이 십자군이 킬리키아 일대를 보급로로 삼기 위해 장악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소(小)[[아르메니아 왕국]] 혹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Armenian_Kingdom_of_Cilicia|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 아르메니아 본토는 13세기 [[몽골]]의 대공세 이후 몽골 제국인 [[일 칸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몽골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관대하여 아르메니아 정교도도 간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동서 문화 교류와 경제 교역이 번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시리아-캅카스-[[이라크]]-[[이란]]을 잇는 무역로를 활용해 많은 활약을 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아르메니아 문학에도 종교문학 일색에서 보다 세속적 형태의 작품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서기 10세기에는 요한 5세에 의해 아르메니아 역사를 담은 연대기가 출간되었으며, 이는 아르메니아인이 직접 저술한 최초의 아르메니아 역사서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몽골 국가가 몰락한 뒤 혼란이 이어지면서 무역이 쇠퇴하여 아르메니아 왕국은 마침 [[레반트]] 지역으로 들이닥쳤던 [[십자군]]과 동맹하기도 하고 [[몽골]]과도 동맹을 하며 그럭저럭 버티다가 1375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