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이란의 사파비 왕조 몰락 이후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동부의 카라바흐 칸국이 들어서며 [[아프샤르 왕조]]와 [[카자르 왕조]]의 봉신국 역할을 하였다. 카자르 왕조 봉신국들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영 아니었는지 당시에는 인구가 상당히 희박한 편이었다. 러시아 정복 직전 나히체반 칸국은 보병 800여 명에 기병 2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자랑하던 수준이었고, 예레반 칸국은 인구 14만 명 정도였으며, 카라바흐 칸국은 가구 수 기준 2만여 호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미 중세 말 티무르 제국의 캅카스 침공과 사파비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납치와 강제이주 정책 이후 아르메니아인 인구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가깝고 좀 더 비옥한 아나톨리아 동북부 지역 혹은 조지아로 이동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를 넘어 남하해 오면서 오스만과 이란을 동시에 압박하기 기작했다.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1813년에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하여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을 흡수하였다. 1828년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리고 이란과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하여 지금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과 남캅카스 전역을 정복하게 된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새로 설치한 아르메니아 주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처음에 2만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2~3백만여 명이었다.] 지역의 무슬림 인구 역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 [[아제르바이잔인]]이나 [[쿠르드인]] 계열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한 이후 이웃 오스만 제국이나 카자르 왕조 영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를 암암리에 장려하면서 오늘날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다시금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류 민족이 되었다. 이렇게 19세기 초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동부 아르메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서부 아르메니아로 나뉘었다. 아제리계 군벌정권들의 무능한 학정 하에서 낙후되어 있던 아르메니아 동부 지역에도 러시아의 영향으로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사료가 남아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치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건과 교육 상태가 열악하여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의 분리주의 운동 탄압도 작용했다. 러시아인들과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의외로 서로 많이 충돌하는 편이었다. 러시아의 여러 민족주의 사상가들은 서구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의 상황을 위로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서 아시아의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는 나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르메니아의 그것과 그대로 겹친다. 19세기 초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믿던 국가 중 하나인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영토 일부분으로 포함되자 러시아인 학자들은 아르메니아를 "러시아 제국이 해방시킨 __아시아의 신비한 고대 기독교 국가__"로 정의하였고,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제국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동로마 제국 전성기 당시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슬라브인들과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아직 문명화되지 못했던, 자신들이 우습게 보던 슬라브인이 당시 와서 종주국으로 군림한다는 불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웃 조지아인들의 경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 시아파 이슬람에서 다시 정교회로 개종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문제가 덜했다. 하지만 무슬림 중앙정부의 지배하에서도 함셴인(Համշենցիներ)과 같은 일부 아르메니아인 무슬림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던 아르메니아인들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갈등이 더 심해졌다.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내부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전근대적 체제를 뒤엎고 집권한 터키 군부도 이 부분에선 술탄 시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오히려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터키 군부가 1차 대전 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이전까지 이뤄지던 전근대적 '진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적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인만 골라 죽인게 아니듯이 이 명칭도 잘못된거라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수십만이상이 학살된 [[쿠르드인]], 50만 이상이라고 추정되는 [[이라크인]]을 비롯한 아랍 무슬림들에서 역시 수십여만 이상이 학살당한 [[아시리아인]]들도 덩달아 마구잡이로 곳곳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단순히 아르메니아인만 특정해 학살한 게 아니라, 이슬람이고 뭐고 반튀르크적인 종족을 아예 절멸시킨다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되려 무신론적에 가까운 범튀르크주의 극단파였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고 알려지다보니 국제적으로 기독교 아르메니아인들만 골라죽여 이슬람 탓으로 하는 엉뚱한 오해도 많다. 당연히 이라크인이나 아시리아인들은 이 명칭에 대하여 분노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탓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당시 대략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 중에 추정치에 따라서는 100만에서 150만에 가까운 숫자가 학살됐다. 이 중 상당수는 대책없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다 병사하거나 아사했다. 또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내부에서 노선 갈등으로 분쟁이 빚어지기도 하고, 다른 소수민족들이 가세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습격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저항 과정에서 터키군이나 [[쿠르드인]] 보조부대에 반공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쿠르드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서로 싸우던 일도 있어서인지 [[디야르바크르]]에 있는 성 키라코스 교회(Սուրբ Կիրակոս եկեղեցի, Surp Giragos Ermeni Kilisesi)도 당시 쿠르드인들에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1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2013년 [[디야르바크르]]시에서 복원했다.] 이때 안드라니크 오자냔(Անդրանիկ Օզանյան, [[1865년]] [[2월 25일]] ~ [[1927년]] [[8월 31일]])과 같은 아르메니아인 군사지도자들이 활약했는데 그의 일생은 영웅화되어 지금도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연도를 봐도 알겠지만, 오자냔은 아르메니아가 소련에게 합병당하는 걸 보고 미국에서 살다가 조국을 안타까워하며 죽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인해 아나톨리아 동북부 아르메니아인들의 전통적인 거주지역[* 아르메니아인들만 거주한 건 아니었고 쿠르드인, 튀르크인 등과 같이 거주해왔다만 해당 지역들이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중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상당수가 황폐화되었으며 제국 내 민족 존립 기반 자체가 와해되었다. 직접적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무슬림으로 위장하고 숨은 후 러시아 제국령 아르메니아로 탈주하였으나, 나중에 아예 무슬림과 동화되거나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등으로 이주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서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부유한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대학살 이전에도 이미 오스만 제국 경제가 어려워진 것을 계기로 대거 프랑스나 미국으로 이민하던 상황이었는데,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로 이주가 더 가속화되었다.[* 1844년 통계 조사 기준 이스탄불 거주 주민은 89만 1천여 명이었는데 이 중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22만 2천여 명이 아르메니아인이었으나 1885년 인구 조사에서는 15만 6861명으로 인구 비중은 17.9%로 감소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이루어지던 지역이 아니긴 했지만 이들이 동부에서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및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상당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 서부에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의 후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